측천무후
2007/01/17 10:00
고건 기사 포스트 올리다가 바로 아래 이 기사가 있어서 추가로 포스트 올립니다.
"... 측천무후는 후궁 신분에서 당나라 고종의 황후가 된 뒤 고종 사후 여황제로 등극, 잔혹한 살상과 탄압을 일삼고 문란한 사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유명하다. ..."
기사 : `측천무후 능에 금은보화 500 t`
기사 말미의 한 줄을 보면 무측천이 무슨 나라 말아먹은 황제처럼 나와서 한마디 추가합니다. 중국의 전제군주 중에 "잔혹한 살상과 탄압"을 한 황제가 한 둘이 아니겠건만 아마 여자 황제라서 저런 기사가 나왔을것 같아서요. 무후가 인자했고 탄압을 안했다는게 아니라 적어도 한 쪽만 이야기하고 다른 쪽은 나몰라라 하는 식으로 한 줄 평가를 하는 것은 역시나 무후가 "남자"황제가 아니라 "여자"황제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진시황릉이 발굴되었을 때 만약 "... 진시황은 전국시대 진(秦)의 왕자로 태어나 통일후 황제가 되어 잔혹한 살상과 탄압, 불로초를 찾는 등 기이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이런 식으로 쓰면 좀 이상하잖아요. ^^ 아래 무측천에 대한 업적부분을 담은 내용을 옮겨봅니다.
"... 무후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서 쓴 탁월한 통치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주된 동기였지만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후가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무후의 통치정책 중 이러한 측면이 갖는 중대한 의미는 오랫동안 중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들은 무후가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을 들어 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해왔다. 무후는 확고한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당조의 안정은 공고하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 ..."
출처 : "측천무후"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 다음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