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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연주하다 악보를 잊어버렸을 때는...

flipside 2023. 5. 9. 20:26

2005/01/02 13:44

 

보스턴필하모닉의 지휘자 벤저민 잰더와 리더십 프로그램 개발자인 그의 아내 로저먼드가 쓴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라 The Art of Possibility]는 처세술이나 자기개발 책으로 분류되지만 - 제목에서도 느껴지시죠 ^^ -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중인 벤저민 잰더의 영향으로 상당히 많은 음악관련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래 유진 레너의 일화는 그 중 가장 감동적이라 옮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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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콜리슈* 현악 사중주단 Kolisch Quartet 은 악보를 전부 외워서 연주하는 독특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레퍼토리에는 쇤베르크, 베버른, 바르토크**, 베르크 등의 아주 까다로운 현재 음악가들의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진 레너 Eugene Lehner 는 이 사중주단의 비올라*** 주자였다. 레너는 이 멋진 사중주단에 얽힌 추억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중에는 주자가 갑자기 악보의 내용을 잊어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주자들 사이의 우정은 아주 돈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회중에 실수가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매번 공연할 때마다 주자들은 온갖 정성과 주의를 기울여 연주에 임했다. 하지만 연주회장에서 그들의 평소와 같은 위기 대처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곡 Op.95****의 느린악장의 중간쯤 레너의 솔로 부분이 나오기 직전, 레너는 갑자기 악보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잊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던 부분이었다. 그냥 어떤 한부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닌 그 부분 전체가 까맣게 의식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청중들은 별 이상없이 연주되는 Op.95를 듣고 있었다. 비올라 솔로는 아주 멋지게 연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1바이올린의 루돌프 콜리슈 Rudolf Kolisch 도, 첼로의 베나르 하이페츠 Benar Heifetz 도 음악에 심취한 채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레너가 연주에서 일시적으로 빠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고 보니 제2바이올린인 펠릭스 쿠너 Felix Khuner 가 비올라의 등장 부분에서 놓치지 않고 대신 들어가 레너의 멜로디를 연주했던 것이다. 다섯음 더 높게 조정된 바이올린에서 비올라와 같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레너는 깜짝 놀랐다. 그는 연주가 끝난 뒤 쿠너에게 어떻게 대신 연주랄 수 있었는지 물었다. 쿠너는 어깨를 한 번 들썩 하더니 대답했다.


"당신의 세번째 손가락이 엉뚱한 현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당신이 다음 악보를 까먹었다는 걸 눈치챘지요."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라], 벤저민 잰더·로저먼드 잰더, 이종인 옮김, 김영사, 2003, 111-112쪽


* 책에는 "콜리시"로 표기했습니다.
** 책에는 "바르톡"으로 표기했습니다.
*** 책에는 "바이올린"으로 되어있습니다. 비올라의 오역이거나 원문의 오타로 보입니다.
**** 책에는 "제95번"으로 되어있습니다. Op.95의 오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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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번역은 매끄럽지만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금방 알아차릴 위와 같은 소소한 오역/오타가 눈에 띕니다. 예전에 본 '퀴즈 프로그램에서 우등생들이 다른 문제는 척척 맞추면서 음악 문제를 못 맞추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워 한다'는 "클래식 중독자의 12가지 특징"이 떠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