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24년 전 설날 풍경
2006/01/31 19:46
난 아직도 깻잎과 콩자반을 잘 못 먹는다. 특정 시기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6학년 2학기에 시골에서 포항으로 전학을 갔던 난 여러 가지로 적응이 어려웠다. 첫 문화적 충격은 도시락이었다. 영화 '집으로'처럼 외할머니와 둘이서 자취를 해서 내 도시락의 주메뉴는 늘 깻잎과 콩자반이었다. 그런데 그곳 아이들의 주메뉴는 토스트와 잼.우유.사과 등이었다. 하여 난 점심때마다 죄짓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폭력적인 담임선생님이었다. 단출한 살림 때문에 수업 준비물을 늘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턴 날 불러내 당장 엄마를 데려오라며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랑 둘이 산다고 매번 대답했지만 계속 엄마를 찾았다. 촌지를 요구하는 뻔한 절차였기 때문에 매일 뺨으로 때우며 버텼다.
어느 날 반전의 기회가 다가왔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 중 뛰어난 그림으로 환경미화를 다시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림을 그려냈다. 제목 '설날 풍경'. 얼음 밭 위에서 팽이를 돌리고, 썰매를 타고, 방패연을 날리는 아이들 그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들어 놀던 기억을 되살려 멋지게 그려냈다. 결과는 좋았다. 6개의 그림 중 하나로 뽑혔고, 이후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확 변했다. 선생님의 뺨 세례도 그쳤다. 드디어 그곳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선 듯했다....
"24년 전 설날 풍경" 중에서, 민규동, [중앙일보], 2006년 01월 28일
찾아보니 민규동 감독은 1970년 생.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나 나는 "비교적" "그나마 좋은" 학교생활을 했구나 하면서 안심할까 하다가도 이런 비상식적인 담임선생을 만나지 않은 것을 두고 기뻐해야 하는 내가 서글퍼 진다. ㅠㅠ
p.s. 그나저나 위 칼럼 전문에서 마지막 문단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