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행복하고 싶으면 불필요한 통찰력이나 상상력은 없는 편이 나아
2006/08/08 20:50
...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약하디약한 얼음조각 같은 것이고, 말이란 망치 같은 것이다. 잘 보이려고 자꾸 망치질을 하다 보면, 얼음조각은 여기저기 금이 가면서 끝내 부서져버린다. 정말 중요한 일은, 말해서는 안 된다. 몸이란 그릇에 얌전히 잠재워 두어야 한다. 그렇다. 마지막 불길에 불살라질 때까지. 그때 비로소 얼음조각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몸과 더불어 천천히 녹아 흐른다. ...
"연애소설" 중에서
... "아니지, 넌 아직 몰라. 넌 아직도 상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하고 있어. 알아 너. 실제로는 연쇄 살인범도 전철을 타고, 각성제에 절어 잇는 인간도 전철을 타, 강간범도 타고. 전철뿐만이 아니지. 어쩌면 네 주치의가 토막 살인범일 수도 있고, 네 이웃이 무자비한 유괴범일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스친 인간도, 극징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런 생각 하면 살 수가 없지."
"옳으신 말씀.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으면 불필요한 통찰력이나 상상력은 없는 편이 나아. 그리고 눈앞에 존재하는 죽음 따위 싹 무시하고 쾌락을 좇으며 사는 편이 훨씬 낫지.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
"영원의 환" 중에서
... "죽고 싶지 않아요."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로 얘기할 마음은 전혀 아니었는데…….
도리고에 씨의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난 눈물 자국이 있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핸들 위에 이마를 올려놓고, 얼굴을 가렸다. 도리에고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이 어디 그리 쉬 죽나."
"지금 이 순간에 죽을지도……."
"사람이 어디 그리 쉬 죽나."
"운전하다가 죽을 수도……."
"사람이 어디 그리 쉬 죽나."
"도리에고 씨는 반드시 가고시마에 가야 해요."
"사람이 어디 그리 쉬 죽나."
"그렇지만……."
"괜찮네, 괜찮아."
내가 내내 듣고 싶어했던 말. 다섯 달 동안, 누군가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던 말.
나는 핸들에 이마를 올려놓은 채 한동안 울었다. 족히 다섯 달 분의 눈물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는 동안, 도리고에 씨는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꽃" 중에서
[연애소설], 가네시로 가즈키, 양억관 옮김, 북폴리오, 2006
가네시로 가즈키 팬이기 때문에 즐겁게 읽은 책. 마지막에 실린 중편 "꽃"을 읽으면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영화로 만든다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될 듯. 이 책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출간된 가네시로 가즈키 책은 만화 [레벌루션 No.3]까지 모두 읽었음 ^^V(찾아보니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만화로 나왔더군요. ^^) 개인적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다.
[GO] > [레벌루션 NO.3] > [플라이 대디, 플라이] = [스피드] = [연애소설]
p.s. 원서 표지는 말 그대로 담백 그 자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