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소고기덮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세계
2007/05/07 21:50
"대학 시절에 동아리 선배가 한 명 있었는데, 매일 소고기덮밥만 먹었어요. 정말 소고기덮밥을 좋아해서, 세상 모든 것을 소고기덮밥에 비유해서 생각하기 일쑤였죠. 당시 소고기덮밥이 일인분에 400엔 정도 했으려나. 영화 한 편 보는데 1600엔이라면, 난 그게 싼 건지 비싼 건지 몰랐는데, 그 선배는 아주 명확했어요. 1600엔이면 소고기덮밥을 네 그릇 먹을 수 있으니까 비싸다는 식으로 말이죠.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면 소고기덮밥 네 그릇의 가치는 없다고요. 그리고 같이 쇼핑하러 갔다가 티셔츠를 살까 말까 망설일 때도, 그 선배의 기준은 소고기덮밥 일곱 그릇을 먹을 수 있다, 그 티셔츠에 소고기덮밥 일곱 그릇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늘 아주 진지하게 소고기덮밥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했어요."
"어리석은 남자로군."
하마지리의 비아냥거림에 에리코는 풋 하고 웃었다.
"네, 그래요, 하지만 나는 그 선배가 부러웠어요, 소고기덮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세계가 너무 확고해서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 반대였어요. 내게는 그 선배의 소고기덮밥 같은 데 없었으니까요. 뭘 기준으로 살면 좋을지 몰라서, 늘 누군가의 잣대를 빌렸죠. 애인이나 친구, 혹은 부모님의 생각에 의지하고 매달리고……. 우리집에 강아지가 오기 전까지는."
에리코는 목소리의 톤을 약건 높여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강아지, 아, 이름이 비비예요.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비가 신장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수의사가 매일 식사에 신경을 쓰라고 하면서 전용 통조림 사료를 처방해주었죠. 하루에 800엔이에요. 날마다 800엔. 솔직히, 뼈아픈 투자였죠. 그래서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사들였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나의 소고기덮밥이 된 거예요. 레스토랑에서 런치를 먹을 돈이면 비비의 이틀 치 사료를 살 수 있다. 뷰티 숍에 갈 돈이면 20일 치 사료를 살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순간, 그 전까지 늘 흔들리던 하루하루가 갑자기, 뭐랄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세상을, 그리고 나 자신을 조금은 믿을 수 있게 되었달까."
"강아지의 산책" 중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 모리 에토, 김난주 옮김, 시공사, 2007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지난 제133회 수상작인 [꽃밥]처럼 단편모음인데 상받을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을 묘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6편이 담겨있습니다. 홍보 카피는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의 감동을 강조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첫 작품인 "그릇을 찾아서"와 위에 밑줄 그은 "강아지의 산책"이 더 맘에 들었습니다. 나에게 소고기덮밥은 뭘까나... 하고 곰곰 생각하게 되는데 딱히 번뜩 떠오르는게 없네요, 흠냐...
p.s. 원서표지.

p.s. 2 제135회 나오키상은 공동수상으로 미우라 시온의 [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이 공동수상작이었습니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다 보니 [올 요미모노 オール讀物]에 이 두 수상작가 사진이 실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