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2007/05/25 15:40
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게다가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하긴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질투 때문에 더욱더 절망하고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벌레 이야기" 중에서, [이청준 문학전집 - 벌레이야기], 이청준, 열림원, 2002
... 블레이크의 [지옥의 잠언들]에는 "쟁기에 끊겨나간 지렁이는 쟁기를 용서한다"는 경구가 나온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유사한 취지로 니체는 [도덕적 계보학]에서 "왼빰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민다"는 식의 기독교적 모럴은 약자가 품는 분노와 적개심에서 비롯한 것이되 이를 보편화해서 "나도 용서한다. 따라서 너도 나와 같은 처지에 서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으로 바꾸어 놓은 곳이라고 말했다. 알암이 엄마의 절망은 말하자면 완강하게 구축된 이러한 기독교 교리가 은폐할 수도 있는 인간적 진실에의 항변인 것이다.
"문학과 윤리 - 용서의 의미와 이청준의 글쓰기" 중에서, 이성원, [이청준 문학전집 - 벌레이야기], 열림원, 2002
원작을 찾아 읽으니 더 가슴이 아팠다. 영화에서 전도연이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소설 속에서 대사를 통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당신들의 천국]과 [축제] 이후 몰라라 했던 이청준의 작품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새로 나온 [벌레이야기]는 최규석의 삽화가 눈에 띄긴 하지만 해설(나쁜 버릇이긴 하지만 해설을 읽으니 뭔가 좀 정리된 느낌)이 빠진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