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일본전쟁화
2007/09/15 12:17 |
... 나는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화가의 전쟁협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예술작품과 마주했을 때, 내가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양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섰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내 존재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악마적인 힘을 가진 예술작품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후지따의 전쟁화를 처음 볼 때까지는 그런 기쁨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전설적인 작품 앞에 서보니, 과연 솜씨가 좋구나 하는 정도의 감개밖에는 솟아나지 않는다. ...
... 나도 원칙적으로 전쟁화를 전면 공개하는 데 찬성한다. 다만 그것은 '정치'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명작'을 해금하라고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일본전쟁화에는 예술적 가치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제부터라도 '화가 오따꾸'들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을 회피하는 국민적 공모관계가 점점 공고해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자랑하라"는 탁한 목소리까지 줄기차게 들려오게 된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전쟁화가 과연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정당하게' 평가될지, 자신은 없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또다시 전쟁화 앞에 헌금함이라도 놓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후지따 쯔구하루 "싸이판 섬 동포, 신절을 다하다"(1945) 중에서",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김석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
일본의 침략전쟁시기에 일본내에서 군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화가들이 그려낸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 전쟁화 중 대표작 153점은 패전 후 미군에 접수되었다가 1970년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어 현재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 중 전설처럼 이야기 되던 후지따 쯔구하루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의 감상을 소개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라 밑줄을 그었습니다. 서경식씨의 다른 책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와 감상을 밝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모두 인상적이네요.
p.s. 여전히 창비 나름의 표기법(피카소 = 삐까쏘)은 불만이지만, ㅡ.ㅡ 2002년 나온 책이 지금봐도 세련되어 보인다는 점에서 칭찬해 줄 수 밖에 없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