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아무도 그렇게 강하지 못해
2007/09/20 14:46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겠지. 그냥 죄다들 나름대로 살아가게 내버려주는 게 가장 좋겠지. 모든 걸 다 잊고서 말이야. 지금보다 좀더 이성적인 일을 하면서. 난들 이런 일을 하고 싶겠냐? 이 추잡한 일을. 엘리디 같은 인간이랑 얘기하고. 에디 같은 개 같은 자식들을 상대하면서. 홀베르그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나 살펴보고. 강간 보고서나 읽고 똥과 벌레로 가득 찬 집 밑바닥이나 파고, 작은 관이나 파내고."
에를렌두르는 가슴을 좀더 세게 문질렀다.
"너는 그런 일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강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봐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겠지. 그런 일은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듯 갑옷을 입고 멀리서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하지만 거리를 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철판이나 갑옷도 다 소용없어. 아무도 그렇게 강하지 못해. 죄책감이 악령처럼 따라다니면서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으면 절대 마음 편히 못 살아. 그 구역질나는 일들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까진. 그런 게 바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거든. 이번 일도 꼭 그래. 그런 것들이 고삐 풀린 유령처럼 네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상처만 입히게 될 거야."
에를렌두르는 크게 한숨을 지었다. "모든 게 아주 커다란 빌어먹을 늪이야."
[저주받은 피]중에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전주현 옮김, 영림카디널, 2007
스릴러나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슬프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추리소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깊이 보다는 범인의 심리인 경우가 많고, 아무리 강조는 하지만 희생자는 게임이나 퍼즐의 한 조각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죠. 하지만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저주받은 피]를 읽다보니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경찰이 주인공인 소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빈틈없는 탐정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 주인공 에를렌두르는 화를 내며 식탁을 쓸어버리기도 하고, 그의 딸은 마약 중독입니다 - 중간 중간 웃음이 나올 정도의 유머감각이 풍부한 소설이지만, 다른 소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이 분명 느껴집니다. 마지막 부분에 "왜 눈이 있게요?"라는 아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으면 아마 다른 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조잡한 아일랜드식 살인사건"이 불러오는 과거의 기억과 숨겨져 있던 진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강하지 못하니까요.
p.s. 원서, 영어판, 번역본 표지. 다 좋네요~ 영화화 되었다는데 꼭 봐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