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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미국의 패권이 대영제국과 다른 이유

flipside 2023. 5. 15. 01:22

2008/09/15 12:28

 

... 과거의 대영제국이 미국의 세계 패권 확립에 모델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영국은 한계를 알았다. 특히 현재도 미래도 군사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영국은 중량급 국가로서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자리를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세계 정복자들의 직업병인 과대망상증에 걸리지 않았다. 영국은 역사상 어느 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령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통치했지만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해상 패권을 잡았던 영국 해군은 세계 지배에 적합한 군대가 아니었다.
 영국은 침략과 전쟁으로 세계적인 지위를 확립하고 나자 가능한 한 유럽 국가들의 정치에 참견하지 않으려 했고, 서반구에서는 아예 정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제국 산하의 국가들이 자치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세계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 20세기 중반 서방의 해외 제국 시대가 끝날 때 영국은 다른 어떤 제국보다 빨리 '시대의 변화'를 인정했다. 그리고 영국의 경제가 제국의 힘보다는 무역에 의존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그런 손실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영국은 그보다 훨씬 전 미국 식민지를 잃었던 쓰라린 시절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런 교훈을 깨칠 것인가, 아니면 정치·군사적 힘만 믿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쓸 것인가? 그렇게 패권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가, 세계 평화가 아니라 분쟁이,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야만주의가 우세하게 될까? 햄릿의 말처럼 "바로 그것이 문제"다. 오직 미래만이 그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역사가들은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에 필자가 여러분들에게 그 대답을 해 줄 수는 없다.



"미국의 패권이 대영제국과 다른 이유"중에서,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이원기 옮김, 민음사, 2008




홉스봄이 여러 매체, 강연을 통해 발표한 에세이, 강연 원고를 한 권으로 묶은 책으로 20세기와 21세기의 전쟁, 평화, 제국, 민주주의, 테러, 폭력, 미국, 민족주의에 대한 10편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마다 세계라는 커다란 그림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을 깊이 느끼게 되는데, ㅠㅠ 그나마 이 책은 민족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폭력의 시대의 공공질서"라는 장에서는 축구와 훌리건의 예를 들고, 세계적인 국가간의 전쟁은 줄어들겠지만 내전, 소규모 국지전은 훨씬 늘어날 것이며, 민간인 피해는 엄청나게 된다고 말하면서는 "2000년 미얀마의 전투관련 사망자는 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국내에서 집을 잃고' 난민이 된 사람은 약 100만 명이나 됐다"고 이야기 하는 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어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이 읽었지만 논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쪽이 채 안되는 짧은 책이고 어떤 장은 10페이지도 채 안되지만 귀 기울일 가치가 충분한 이야기들로, 앞으로의 세기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큰 그림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네요.




p.s. 원제는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 홉스봄의 저작들이 대부분 "~의 시대"라는 것에 착안한 출판사가 그의 자서전 "Interesting Times"(흥미로운 시대)를 [미완의 시대](민음사, 2007)라고 번역해서 출간한데 이어서 이번 책은 [폭력의 시대]로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Interesting Times"의 표지 사진을 원래 번역본에는 사용하지 않고 이번 책에 사용한 것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래는 번역본 표지와 원서표지, 그리고 "Interesting Times" 표지와 번역본 [미완의 시대]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