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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귀신들한데도 이런저런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flipside 2023. 5. 16. 08:13

2008/10/04 23:34

 

... 바로 이런 게 안 좋다니까.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굴면 거기에 귀신이 몰려드는 것이다. 나는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귀신이라. 좋아, 일단 있다 치자고. 하지만 귀신들한데도 이런저런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귀신이 잘 나타나는 사람과 안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파티에 처음 갔다고 하지. 하지만 아무도 소개를 해주지 않는다. 파티에 온 다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며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득 그때 할 일 없이 혼자 따분해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 생각을 하먄 그 마음이 전달되어 상대방도, '말을 걸어주면 한번 얘기해 봐야지.'하는 표정과 태도를 취한다.
  먼저 이심전심이 있고 나면 우호적인 마음이 오가는 것을 서로 확인하게된다. 이쪽에서 "참 화려한 모임이네요."하며 접근하면 상대도 얼씨구나 화답한다. "정말로 호화롭네요." 그렇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사는 차원이 인간과 다른 귀신이라도 이것저것 인간에 관해 연구하고 있을 게 뻔하다. 이 인간은 귀신과 궁합이 좋은지 나쁜지(속기 쉬운지 어떤지) 등등 상하좌우를 두루 살펴가며 궁리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귀신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궁합이 안 좋은 축에 속할 테니 아예 처음부터 무시해버릴 테지.
  "에이, 저 할망구는 못써."
  반면, 미간에 깊이 새긴 세로 주름, 숨죽인 목소리, 절박한 표정 등은 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곰팡이다 보니 귀신은 그 좋은 코로 금방 냄세를 맡고,
  "좋았어, 저 여자가 딱이야!"
하며 다가온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실은 나도 귀신이 무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흔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귀신을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앞으로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우타코 씨 탐정 되다" 중에서, [두근두근 우타코씨], 다나베 세이코, 권남희·이학선 옮김, 여성신문사, 2007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과 [아주 사적인 시간]로 만난 바 있는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집.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사는 77세의 할머니가 주인공인 연작 단편 7편이 실려있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워낙 매력적인 탓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서 하하하 웃기도 했구요. 남편과 사별하고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은퇴한 우타코 아줌마(할머니라고 하면 화를 내는 ^^)가 겪는 노년의 일상 이야기들인데, 뭉클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부분에 버릇없는 아들들과 유산을 기다리는 (코믹한) 며느리들의 이야기도 양념처럼 섞여서 한 편 한 편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타코 아줌마는 재력도 풍부하고 (젋었을 때 고생했고 재테크를 위해서 노력도 기울여서 ^.^) 자신의 선택이나 기준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도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 정도의 현실성이 있는 점도 맘에 들었습니다. 혼자 사는 불쌍한 노인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노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과는 정반대에 있는 주인공이 작가의 연배와 겹치면서 (다나베 세이코는 1928년생) 작가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는데 다른 작품들도 번역 출간되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p.s. 번역본 표지는 [연문]의 표지처럼 -_- "아 좀 더 표지가 잘 나와서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는데, 어찌보면 화사한 것이 소설 내용과 맞는 부분도 있는 것 같네요. 원서 표지의 일러스트는 딱 우타코 할머니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