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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없다, 없다의 행렬

flipside 2023. 5. 16. 08:22

2008/11/12 00:40 

 

  ... 편의점을 뒤로하고 하숙으로 돌아온 나는 인스턴트 수프를 홀짝인 다음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이부자리 안의 어둠을 향해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해도 혼자"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약해진 몸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옮겨 다녀봤자 제대로 된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입학 이후 결코 올라간 적 없고 앞으로도 전혀 올라갈 기미가 없는 학업 성적. 취직 활동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구실을 높이 내건 채 뒤로 미룰 뿐. 융통성도 없다. 재능도 없다. 저축한 돈도 없다. 완력도 없다. 근성도 없다. 카리스마도 없다. 사랑스러워 뺨을 갖다 비비고 싶어지는 새끼 돼지 같은 귀여움도 없다. 이렇게 '없다, 없다의 행렬'이 이어져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이부자리에서 기어 나와 한동안 두 평 남짓한 방 안을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돌아다니면서, 어디 귀중한 재능이 굴러다니지나 않나 살폈다. 그러다 문득 1학년 때 '능력 있는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말을 믿고 '재능의 저금통'을 옷장 속에 숨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있었어! 오오, 그거야!"하고 나는 신이 났다.
  옷장을 열자 온통 웃자란 버섯투성이었다. 나는 '언제 이런 꼴이 됐지?'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미끈거리는 버섯을 밀어제첬다. 그 속에서 꺼낸 '재능의 저금통'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내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나는 저금통을 거꾸로 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보았지만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꾸준히'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만 이부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



"나쁜 감기 사랑 감기"중에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서혜영 옮김, 작가정신, 2008




옮겨적으면서도 방을 두드리며 재능을 찾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면서 킥킥거렸습니다. 원래 저는 이 소설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애매한 설정과 애매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즐겁더라구요. 옮긴이의 말에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소설평으로 개인적인 느낌을 대신합니다. 일본의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느낌을 딱 잘 잡아서 표현해 주네요.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공허해진다.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무책임한 의무의 방기가 아니다. 손끝에 닿는 기묘한 감촉, 혹은 이 혀끝의 촉감을 직접 맛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둘다 맘에 드네요. 만화판 표지는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