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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해서

flipside 2023. 5. 18. 19:30

2010/05/19 23:38

 

... 처음 사복형사가 되었을 무렵, 치카코는 경찰서 내에서 취조의 달인이라 불리던 선배와 한 해가량 책상을 마주하고 지낸 적이 있다. 자백을 받아내는 데는 최고라 할 만한 그런 취조의 달인은 어느 경찰서에나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인데, 대개는 산전수전 다 겪어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선배 남자 형사들이다. 그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생한 사람답게 처지가 곤란한 사람에게 자상했다. 여형사는 미숙하고 수사에 큰 도움이 안된다는 풍조가 지배적이던 당시의 형사실 안에서 가급적이면 치카코를 편들고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그 달인이 가르쳐준 것 가운데 치카코가 제대로 익힌 게 딱 하나 있었다.
  취조실에서 상대하는 피의자의 눈이 불안하게 허공을 더듬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자기 이야기의 모순을 지적당해서 당황했거나,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으려다 당황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의 움직임이 불안해지고 초점을 잃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아주 순간적이고, 본인도 그걸 의식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럴 때는 말이야, 이시즈 씨.
  달인이 말했다.
  -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 봉인해둔 기억이 불쑥 되살아나는 거지. 그것도 엄청 선명하게, 그쪽에 신경을 쓰다보니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는 거야. 대충 진술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의 눈동자 움직임하고는 전혀 달라. 그걸 제대로 구분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해.
  그렇게 불쑥 되살아나 주의력을 빼앗는 것은 어떤 피의자에겐 범행에 관한 상세한 재현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피해자에겐 자기를 지독하게 학대한 새아버지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
  -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해서 반드시 그 녀석이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는 이야기야. 조사 대상이 된 사건과 눈동자를 흔들리게 한 기억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해를 깊게 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돼. 그러니까, 마주 앉은 피의자의 눈동자가 마치 안으로 숨어 들어가듯 허공을 더듬으며 초점을 잃게 되면,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잘 기억해둬야 해.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까.
  치카코는 지금도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취조의 달인이 된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



[크로스 파이어] 1권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 권일영 옮김, 2009, 랜덤하우스코리아




요즘 EBS에서 하고 있는 [다큐프라임] "말하기의 다른방법"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의식하지 않은 몸짓이었는데, 어제 방영된 "몸짓의 기억"에서도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부산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조용하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최소화 한다는 것이지요. "말하기의 다른방법" 시리즈가 하는 중에 [크로스 파이어]를 읽다 보니 이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밑줄을 그어봤습니다.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늘 그렇듯 재미있지만 슬프고, 읽고 난 뒤에 여러가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줍니다. 마무리장면을 보며 "준코가 너무 불쌍하잖아."하며 주인공을 안타까워 하다가 "그래.. 그렇게 끝나는 것이 맞겠군." 하면서 결말부분을 긍정하기도 하고... 왔다갔다 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고독과 갈등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한데, 예전 메가박스 일본영화제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크로스 파이어]를 매진으로 못본 것이 무척 아쉽네요. 미야베 미유키 팬이라면 적극추천하고 싶습니다. 초능력자가 주인공인 다른 작품 [용은 잠들다]와 비교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크로스 파이어]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




p.s. [크로스 파이어]에는 잠깐 언급되는 사건의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외전격인 단편 "번제"가 실린 [구적초](북스피어)를 먼저 읽어서 소설에 좀 더 쉽게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해당 내용은 책 말미 역자 후기에도 언급됩니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번역본 표지의 일러스트가 맘에 쏙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