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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마침내 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flipside 2023. 5. 18. 19:43

2010/11/07 14:18

 

일을 거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아직 자잘한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들판이 깨끗해 보이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일을 완전히 다시 시작했다. 대문 옆 울타리에 걸려 있던 낡은 곤포 끈들을 찾아 몇 개를 묶어 이었다. 거기에 작은 나뭇가지들을 걸어 크게 한 짐씩 끌어다 옮겼다. 또 작은 손도끼를 가져다가 비죽비죽 자라나는 새 덤불들을 베어내고 천천히 불을 지펴 태웠다. 그렇게 다 끝낸 뒤에 차 한잔 마실 겸 쉬려고 했는데 아직도 들판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톱과 손도끼로 남겨져 있는 나무 밑동들을 땅바닥까지 바짝 잘라 한쪽에 쌓아두었다. 대부분이 집에서 장작으로 쓰기 좋은 나무들이라 낭비하기에는 아까웠다. 그 작업까지 끝내고 마지막으로 한번 들판을 돌아다니며 간간이 남아 있는 나뭇조각들과 바람에 날아온 목초포장 비닐이나 비료봉지 같은 낡은 비닐들도 주워다 태웠다. 이내 지독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악취를 피하려고 연기가 날아가는 반대편으로 계속 피해 다녔다.
  마침내 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깨끗한 들판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서 있는데 피제이 아저씨가 돌아왔다. 아저씨가 내 옆으로 와서 들판을 바라보았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보는 것 같아 내가 해놓은 것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정신만 차리면 남들 못지않게 잘살 수 있을 거다."
"네?"
"네가 관심만 가지면 뭐든 잘 해낼 거라는 말이야." 아저씨가 날 쳐다보았다. "앞으로 무슨 직업이 갖고 싶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믹의 아버지는 뭔가를 했지만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 참, 카멜 이모도 직업이 있다.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모르겠어요.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요."
"차차 알게 되겠지. 넌 아직 어리니까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밤을 쫓는 아이]중에서, 케이트 톰프슨, 나선숙 옮김, 랜덤하우스, 2009




밑줄로 옮겨본 부분만으로는 제가 느낀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문제아 바비가 어떤 아이인지 확실히 다시 느꼈고, 써있지 않았지만 피제이 아저씨가 들판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본 이유도 마음 속으로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법에 걸린 듯한 책"이라던가 "보기 드문 귀한 책"이라는 뒷표지의 찬사가 그냥 허언이 아니었어요. 결말이 어떻게 날지 내내 마음을 졸였는데 마지막 에필로그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졌어요. 제가 이런 말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지만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소설 내용과는 어울리는 것은 확실히 원서 표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