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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단 (4)

flipside 2023. 5. 18. 19:51

2011/04/12 23:20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상처받기 쉬웠던 시절에 아버지가 충고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이래로 그 말씀을 마음 속에 되새겨 왔다.
-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이만식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이 냉장고의 전신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 카스테라, 박민규, 문학동네, 2005




"외할아버지, 시간 없어요!" 내가 소리쳤다. "우리 오늘 저녁에 축하파티 할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내 말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는 다른 노인들과 볼링을 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죽마고우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공을 굴릴 차례였다. 외할아버지는 공을 가슴에 안고 까만 출발선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릎을 구부려 포즈를 취하자 바지 끝이 올라갔다. 그 바람에 빨간 양말이 힐끗 드러났다. 왠지 생뚱맞아 보였다. 외할아버지는 볼링공을 굴리고 나서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굵게 주름진 양손이 홀가분해 보였다. 볼링공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드러운 잔디밭 위로 굴러가 핀을 맞혔다. 외할아버지가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 할머니의 연애시대, 벌리 도허티, 선우미정 옮김, 창비, 2007




화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나딘은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 첫머리 자막을 재빨리 넘겨버렸다. 그것은 구형 비디오이고, 리모컨도 없다.
- 베즈 무아, 비르지니 데팡트, 최경란 옮김, 책세상, 200




상강(霜降)이 엊그제 지난 탓인지 끄무레한 새벽이면 제법 날이 선 무서리가 변소 뒤쪽의 멀쑥한 피마자 이파리에 내려앉았다. 비록 이피리라곤 성한 게 몇 장 안 남았을 정도로 심란한 쑥대머리 형상을 뒤어쓰곤 있지만 뿌리내린 터가 워낙 걸쭉해서 그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씨방만큼은 아이들의 옹골찬 낭심처럼 뿌듯하게 영글어 강낭콩만한 알록달록한 피마자씨가 열렸었다. 아랫집 혜정이 엄마가, 자기집 애들이 횟배를 앓는다며 정작 피마자씨를 돌 틈에 박아 넣어 싹을 틔우게 한 끝방 최씨의 마누라인 나주댁하고는 한마디 상의조차 없이 건너뛰고 주인집인 장석조 씨 마누라에게 말을 넣어 도거리로 훓어 가는 바람에 한바탕 드잡이까지 갈 뻔한 동티가 나기도 했다.
- 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고려원, 1995




2월의 첫 번째 일요일, 스이도바시 역에서 도보로 4, 5분 정도에 위치한 공민관에서 열린 '범죄 피해자 가족의 모임'은 50명 정도가 출석해 저녁 5시에 시작했다.
- 제물의 야회, 가노 료이치, 한희선, 이미지박스, 2008




리스본 어느 광장에 가면 한가운데에 루시타니안 사이프러스(그러니까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밖으로 평평하게 뻗어 나가도록 가꿔 놓았기 때문에 햇살도 빗방울도 뚫지 못할 직경 이십 미터의 거대한, 그리고 아주 나지막한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백 명은 너끈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다. 비틀리고 육중한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는 쇠 버팀대가 가지를 받치고 있다. 수령은 최소한 이백 년이 넘었다. 그 옆의 공공 게시판에는 지나는 이들을 위한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 여기, 우리가 만나는곳, 존 버거, 강수정 옮김, 열화당, 2006




초록색과 노란색 깃털의 앵무새 한 마리가 문밖에 걸어놓은 새장 속에서 쉬지 않고 되풀이해 지저귀고 있었다.
- 이브가 깨어날 때, 케이트 쇼팬, 이소영 옮김, 열림원, 2002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 어림짐작으로도 열 발 이상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소리다. 아니 그것은 정확지 않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이 새어들고 있는 내 방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총소리의 여운을 계산한다면 열 발 이상이라는 느낌이 착각일 수도 있다. 난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놓아둔 권총을 급히 집어들고 장전을 한다. 안전 장치는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슬라이드를 뒤고 당길 때의 철커덕 하는 경쾌한 소리와 검은색 베레타의 그 묵직함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정신을 수습하려 애를 써본다. 아직도 총소리의 메아리에 귀가 멍멍한 듯했다. 어쨌건 꽤 많은 수의 총알이 발사된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K-2 따위의 소총을 자동으로 놓고 드르륵 갈겨버린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M-9 베레타나 K-5 등의 오토로더 식의 소구경 권총이나 몇십 년 전에나 사용되었음직한 리볼버 식의 K-45 구경을 힘겹게 노리쇠를 당겨가며 연속으로 발사하는 소리였다. 만약 열 발 이상이라면 45 구경은 아닐 것 이다. 기껏해야 약실에 한 발 더 장탄한다 해도 6+1 이상을 잴 수 없는, 지금에 와선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 K-45 구경이 아니던가.
- DMZ, 박상연, 민음사, 1997




'가발 미용실 2호점'의 점장 가쓰라 고조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은 열심히 잘라주면서 정작 자기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가발이라는 티가 너무 확실하게 나기 때문에, 손님들은 가발을 쓰는 게 콘셉트인 미용실인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한번 자세하고 물어보고 싶지만 가발 얘기 같은 건 왠만해서는 본인에게 묻지 않는 게 예의다.
- 가발 미용실 2호점, 야마자키 나오코라, 서혜영 옮김, 민음사, 2010




1759년 9월 29일 해가 질 무렵, 칠레 해안으로부터 약 60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위치한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郡島) 지역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졌다. 버지니아 호의 선원들은 갑판에 모여 배의 돛대와 활대 끝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대기에서 생성되는 전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격렬한 뇌우를 예고하는 '생텔름'이라는 불꽃이었다. 다행히도 로빈슨이 타고 있는 버지니아 호는 두려워할 게 - 가장 격렬한 폭풍우조차도 - 전혀 없었다. 이 배는 네덜란드 국적의 연안 어선이었는데, 돛대가 상당히 낮고 육중해서 빠른 속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그 어떠한 악천후에도 끄떡없을 만큼 안전했다.
- 로빈슨과 방드르디, 미셸 투르니에, 이원복 옮김, 좋은벗, 2004




규진이 봉투를 꺼내 내게로 던졌다. 속에는 청첩장이 들어 있었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민음사, 2000




프랑스 전역의 중앙 형무소 가운데 유난히 마을을 끄는 곳이 퐁트브로 형무소이다. 그곳은 나에게 다른 어느 곳보다 슬픈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다른 형무소들은 잘 알고 있는 죄수들까지 퐁트브로라는 이름만 듣고도 나처럼 고통스러운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을 끄는 이 강한 힘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태여 밝히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든, 프랑스 왕가의 혈통을 받은 그곳의 수녀원 원장 때문이든, 아니면 그 형무소의 외관이나 높은 담벽, 담쟁이덩굴 때문이든, 다른 곳보다 더 흉악한 죄수들을 수감하고 있기 때문이든, 혹은 퐁트브로라는 이름 떄문이든 아무래도 좋다. 다만 나로서는 이 모든 이유 외에 또 하나의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 장미의 기적, 장 주네, 민희식 옮김, 고려원, 1996




장님의 시야에 일순간 어른거리는 햇빛처럼 소름끼치는 이 무서운 일의 시초는 잠시 비명처럼 멈추었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형체를 찾을 수 없는 일순의 공포였다.
- 엑소시스트, W. P. 블레티, 하길종 옮김, 범우사, 1994




기나긴 열대야 뒤에 찜통 같은 새벽이 왔다.
- 황금을 안고 튀어라, 다카무라 가오루, 권일영 옮김, 노블마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