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단 (8)
2011/09/09 01:13
콜필드의 여름밤은 정말 기분이 좋다. 헬리오트로프와 재스민, 그리고 인동덩굴과 클로버의 향기가 난다. 이곳에서는 별빛도 따스하고 부드럽다. 전에 있던 곳처럼 차갑거나 쌀쌀하지는 않다. 아주 낮게 우리들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열어젖뜨린 창문의 커튼을 흔드는 미풍은 갓난아기의 입맞춤처럼 부드럽고 촉촉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무성한 나뭇잎들이 자다가 몸을 뒤척이고, 다시 잠에 빠지는 것처럼 서로 스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푸른 잔디밭 위를 흐르며 잔디를 자른 흔적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는 정적이, 완전한 평화와 평온함과 고요가 있다. 정말 콜필드의 여름밤은 기분이 좋다.
- 죽은자와의 결혼(1948), 윌리엄 아이리시,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1992
이것은 내가 낡은 가죽 트렁크를 되찾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2000), 온다 리쿠,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7
나는 마침내 저 엄청난 불행과 상실의 시기에서 이제 막 벗어나는 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모진 고통이라든가 영육의 파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잃는다는 것. 잃었다는 것. 이러한 어둠은 기껏해야 몇 분, 아니 몇 시간 지속될 뿐이며, 모두가 그렇듯이 이들 낙담한 사람들 역시 그 사이사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저 행복의 단일함을 맛보면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행복이란 머릿속에 지니고 다니는 행운의 창유리 같은 것이다. 행복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기지를 다 발휘해야 하며, 일단 그것이 깨지고 나면 전혀 다른 삶으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다.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그녀(2002), 캐럴 실즈, 한기찬 옮김, 민음사, 2009
……………부우―――――――――――웅웅웅――――――――――――웅웅웅웅…………….
내가 거슴츠레 눈을 떴을 때 마치 꿀벌이 윙윙거리는 듯한 울림은 탄력 있는 긴 여운을 남기며 하염없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 도구라마구라(1935), 유메노 큐사쿠, 이동민 옮김, 크롭씨클, 2008
40번째 맞는 생일날, 도냐 루끄레시아는 베개 위에 깜찍한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편지에는 애정이 듬뿍 담긴 예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궁둥이(1988), 바르가스 요사, 정동창 옮김, 열린세상, 1994
마스 아라이는 모형 스팸 깡통이 탑재된 슬롯머신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는 자주 포커와 블랙잭을 즐겨 왔다. 마스가 보기에 슬롯머신은 늘어진 티셔츠에 귀걸이를 한, 주책없는 뚱뚱한 백인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게임이었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스팸은 음식이었다. 기름이 자르르하게 구운 다음, 네모로 얇게 썰어 찰진 밥과 함께 말린 김으로 묶어 놓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일 뿐이었다. 그건 LA에 사는 일본인들의 스팸 요리법이었다.
- 스네이크 스킨 샤미센(2007), 나오미 히라하라, 안인옥 옮김, 황매, 2009
60년이 지난 지금도 가짜 경감 듀의 비밀을 푼 사람은 없다.
- 가짜 경감 듀(1983), 피터 러브시, 강영길 옮김, 동서문화사, 2003
어느덧 교장의 연설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기분 좋은 암고양이처럼 가르랑댔다. 성능 좋은 마이크가 그 작은 소리까지 고스란히 운동장 곳곳에 전달시켰다. 학교와 이웃한 아파트의 부녀회에서 볼륨을 좀 낮춰달라는 항의가 있고부터는 최대한 볼륨을 줄여놓았지만 대신 교장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간 자신의 목소리가 사이를 두고 운동장 양쪽 모서리에 달아놓은 두 개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지금 하고 있는 말과 방금 전 흘려보낸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있는 말이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한 자 한 자 적당한 사이를 두고 또박또박 발음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했다. 특히 경음과 연음에 신경을 써서 발음하려 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이 '소적새'라고 불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 내 영화의 주인공(2001), 하성란, 작가정신, 2001
"눈이 평소에도 이런 색입니까?"
- 오늘밤 모든 바에서(1991), 나카지마 라모, 한희선 옮김, 북스피어, 2009
우리는 여태껏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밭 세 군데를 내달렸다.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러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처음 와본 곳이라 어디가 위험한 곳인지를 알지 못했다.
- 1월 0일(1995), 바르트 무이아르트, 한경희 옮김, 낭기열라, 2010
내 존재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는 의지도 있고 감정도 있다. 게다가 믿기 힘들겠지만 자존심도 있다. 인간의 혈액 속에 자리잡고 산다는 습성이 공포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대체 어떻단 말인가. 누구나 어딘가에 정착해 살고 있다. 물고기가 바다나 강에 살듯이. 사자가 아프리카의 대지에 살듯이. 증오나 애정이 사람의 마음에 살듯이.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눈에 띄지 않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까지 온갖 곳을 떠돌아왔다. 닳고닳은 여자의 핏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에이즈 바이러스와 싸우거나(특히 녀석들은 최악이다. 자신들의 확고한 의견이 전혀 없다) 병 속에 갇혀 지냈던 적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영양부족으로 다 쓰러져가고, 때로는 중성지방에 짓눌리고, 비로소 나는 그녀, 재스민을 만났다.
- 애니멀 로직(1996), 야마다 에이미, 유인경 옮김, 태동출판사, 2001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날 석양.
- 태평천하(1948), 채만식, 창작과비평사, 1994
아오야마 시게루[靑山重治]가 재혼을 결심한 것은 아들 시게히코[重彦]가 "재혼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하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 오디션(1997), 무라카미 류, 권남희 옮김, 무당미디어, 1998
틀로크웽가(街) 스피디 모터스의 사장 J.L.B. 마테코니 씨는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를 세운 유능한 탐정 음마 라모츠웨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청혼이었다. 맨 처음, 엄청난 용기를 내어 결혼해 달라고 청했을 때는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주 상냥하게,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절은 거절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테코니 씨는 그녀가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트럼펫 주자이자 재즈광이었던 노트 모코티와의 짧은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은 후, 그녀는 결혼이란 슬픔과 괴로움을 가져다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자기 일과 제브라가(街)에 편안한 자기 집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하고, 일단 남자가 그녀의 집에 눌러앉게 되면 제멋대로 굴지도 모르는데, 그녀 같은 여성이 결혼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가 음마 라모츠웨의 입장이라면, 아무리 자신처럼 착실하고 존경할 만한 상대가 청혼한다 할지라도 거절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기린의 눈물(2000),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이나경 옮김, 북@북스, 2004
이제 됐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다 쌌다. 맨벽들과 쌓아놓은 상자들이 방 두 개를 더 작아보이게 하고, 천장을 더 낮아 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 금요일 저녁(1998), 엠마뉴엘 베른하임,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