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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피트리온 | 이그나시오 빠디야

flipside 2023. 5. 31. 22:06

2007/01/14 22:28

 

[책을 읽고 나서]


특별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비에서 나온 외국소설들은 재미라는 면보다는 새로운 작가의 소개나 고전의 정본 펴내기 식의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실제로 창비 홈페이지에서 찾아본 외국소설은 손을 꼽을 정도로 수가 적은데 최근 개정판이 나온 [올리버 트위스트]나 루쉰의 [아Q정전]은 후자가 되겠고, 이번 이그나시오 빠디야의 [암피트리온]은 전자가 되겠다.) 이런 이유로 재미있는 소설에 손이 가는 내게 있어서 창비의 외국소설은 거의 출간되지 않은 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제목이 눈에 띄어 어떤 작가인가? 하면서 책의 해설을 흘깃 보다가 "...대단히 고차원적인 지적 스릴러..."라는 말의 "스릴러"에 방점을 찍고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지적 스릴러이지만 방점은 스릴러가 아니라 "대단히 고차원적"에 찍혀야 한다는 점. 옮긴이가 "정교한 언어, 잘 드러나지 않는 언어의 음악성, 특이하지만 치밀한 계산하에 사용된 형용사, 현란하면서도 정치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는 저자의 문체와 서사구조는 문장을 따라 읽으면서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면 내가 어디있지는 잊어버리게 만들만큼 집중을 요구한다. 아이히만이라는 소재를 떠올리며 [오뎃사 파일]이나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을 생각하던 내게 작품의 첫 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가볍게 읽기 시작한 독자에게 마음을 다잡으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 얼핏 과묵해 보이는 아버지는 예기치 못한 분노를 내면적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시한폭탄처럼 보였다. 그의 폭발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젊은시절에 당신을 현혹시키던 그 빛을 언젠가는 복원하겠다는 희망만으로 현무암에 터널을 뚫을 수 있는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패패했다는 생각으로 끝없이 읊조리던 독백 끝에 터진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


이런 식의 문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넘처나는 통에 분량은 300페이지가 안되는 책을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읽었는데, 읽고난 후의 느낌은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는 점이었다. 스릴러인 탓에 줄거리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 역자해설에서 정말 잘 요약해 놓은 줄거리가 있는데, 다 읽긴 했지만 뭔가 좀 건너 띈 나같은 독자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 작가가 건설해 놓은 이야기 구조는 교묘하고 섬세하며, 감탄이 나올만 하다.


새로운 작가의 작품 읽기를 즐기는 사람과 지적인 스릴러, 뭔가 숨겨진 역사적 사건의 가려진 이면에 대한 소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적극 추천한다. 노력은 해보았지만 지하철에서 읽기는 힘든 책으로 조용한 공간에서 문장 하나 하나를 씹어가며 천천히 읽어나가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도 고려하시길.


[서지정보]


제목 : 암피트리온
원제 : Amphitryon (2000)
지은이 : 이그나시오 빠디야 Ignacio Padilla
옮긴이 : 조구호
출판사 : 창비
발간일 : 2006년 10월
분량 : 275쪽
값 : 9,800원




p.s. 이탈리아를 이딸리아로, 우크라이나를 우끄라이나로 표기하는 창비의 지명 표기법은 그냥 그렇다고 이해한다손 치더라고 섹스를 쎅스라고 쓰고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별나다.


p.s. 원서표지. 책에는 체스가 주요한 소재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