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주 17

내 남자 | 사쿠라바 가즈키

2009/03/07 09:16 [책을 읽고 나서] 표지에 "해서는 안 될 가장 처절하고 슬픈 사랑.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달콤하지만 죄의 향기가 나는 소설"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금기시 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딱 떠오르는 것은 남매간의 사랑?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1장인 "2008년 06월 하나와 낡은 카메라"를 읽기 시작합니다. 비오는 날 "너무 오랫동안 함께 지낸 탓"에 지금까지 대화는 별로 하지 않고 "집요한 애정"만 남은 나이든 남자와 만난 주인공 하나는 약혼자 요시로와의 약속이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합니다. 음 불륜의 상대와 결혼 전날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인가? 하지만 이 둘은 약혼자와 만나서 인사를 나눕니다. 바로 이어지는 담담한 이야기. "구사리노 준고는 내 양아버지다. 그가 ..

book 2023.06.04

임신 캘린더 | 오가와 요코

2006/04/09 21:50 [책을 읽고 나서] 자칫하면 생활/가정 코너로 분류될 만한 제목을 가진 오가와 요코의 단편집 [임신 캘린더]에는 언니 부부와 함께 사는 여동생이 언니의 임신 진행에 따른 심리변화를 잘 묘사한 "임신 캘린더", 남편과 일때문에 떨어져 있는 주인공이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를 사촌동생에게 소개해주면서 생기는 사건을 묘사한 "기숙사", 부모와 반대하는 결혼을 앞둔 한 여성이 한 부자(父子)를 만나면서 듣게되는 이야기를 다룬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 이렇게 3편이 담겨 있다. "임신 캘린더"는 아래 밑줄 그은 부분처럼 "희미한 두려움과 불안"이 전체 작품을 감싸고 있는 탓에 큰 사건이 없음에도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마지막 장면까지 읽고나면 섬뜩한 느낌을 준다..

book 2023.05.30

비타민 F | 시게마츠 키요시

2005/04/03 11:27 [책을 읽고 나서] 책 제목의 F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작가의 말에서 family. farther, fight, friend, fragile, fortune 등을 키워드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전체 7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F는 역시 Farther이다. 아버지 = 가족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모든 글에서 그는 아버지의 한 남자로서의 인생과 가족내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해피엔딩이라고 부를만큼 말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울한 결말도 아닌 각 작품의 끝은 가족이나 아버지가 가진 속성 - 명쾌한 어떤 공식이 적용되기 어렵다는 - 을 그대로 잘 드러낸 것 같아서 공감이 간다. 모든 단편이 고른 재미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국내에 이미 출간된 ..

book 2023.05.28

GO | 가네시로 가즈키

2004/10/24 10:02 [책을 읽고 나서] 우선 [GO]는 재미있다. 사실 책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책은 곳곳에서 단지 주인공의 상황이나 대사만으로도 사람을 웃긴다.(같은 식으로 사람을 울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역자가 이미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재일문학이, 재일동포가 주인공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이 책에서는 찾을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이 책이 주인공 스기하라가 밟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공은 누구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심각하게 던지면 끊임없이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결론을 얻는다. 책 뒷표지에 보면 야마다 에이미(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가 이 책에 대해 한 말이 써있다. "청춘소설..

book 2023.05.28

인스톨 | 와타야 리사

2004/10/09 19:40 [책을 읽고 나서] 우선 2002년 당시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다룬 신문들은 모두 하나같이 원조교제, 섹스채팅, 페도필, 스캐톨로지 등 자극적인 섹스 관련 단어들을 담고 있다. 실제로 그런 단어가 책에 나오니까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단지 주제보다는 자극적인 소재만을 드러내 강조하는 것은 영 못마땅하다. 개인적인 [조선일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김광일 기자의 "저자는 여고 3학년이다. ‘일본의 여고생’은 오늘날 세계적인 에로 브랜드가 돼 있다. 그들의 세계를 엿보고 싶은 분들께만 권한다."(2002-02-02)는 말은 이 책을 마치 무슨 여고생의 섹스산업 체험담쯤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혹시 김광일 기자가 이 책이 일본학교도서관협의회 선..

book 2023.05.28

[밑줄] 범죄의 트릭은 마술과는 달라

2010/03/01 10:19 "우쓰미 양,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물리는 마술이 아니야." "하지만 교수님은 지금까지 마술 같은 트릭을 몇 번이나 해결하셨잖아요?" "범죄의 트릭은 마술과는 달라. 그 차이를 아나?" 고개 젓는 가오루를 보고서 유가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양쪽 모두 근거는 있어. 다만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지. 마술은 연기가 끝나는 동시에 관객이 근거를 파헤칠 기회도 없어져. 그런데 범죄의 트릭은 그 현장을 수사진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조사할 수 있어. 무슨 장치가 있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지.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는 것이 범죄트릭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야." [성녀의 구제]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김난주 옮김, 재인, 2009 소설 내용에..

underline 2023.05.17

[밑줄]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2010/02/22 00:40 ...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마시면서 한숨 돌리고는 집필을 시작했다. 요즘은 주로 코믹 소설을 쓰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편집자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코믹이 팔리지 않는다. 미스터리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찬밥 취급 당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상을 받고 소설이 팔리기 시작하자 독자들도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는지 주문이 쇄도한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에는 단독 행동을 좋아하는 괴팍한 사람이란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게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다. 코믹 소설은 깨어 있는 냉철한 시각이 없으면 쓸 수 없다. 현실주의자가 아니면 인간 세상의 해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문학적인 소양이 없는 탓에 늘 악전고투하고 있다. 마감 날이 가까..

underline 2023.05.17

[밑줄] 안녕. 너희들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무식한 나를 용서해다오

2009/10/20 13:37 ... 다음 날, 나는 강의가 끝난 후 도서관에 가서 영화에 관계된 책이 꽂혀 있는 서가 앞을 어슬렁거리며 한 시간을 보냈다. 영화 작품론이 대부분이었다. 필름이나 영사기, 영사 기사등의 잡학을 다룬 책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로마의 휴일]에 관한 책이나 읽어볼까하고 몇 권 들춰보았지만 [로마의 휴일]이란 제목이 실려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나는 물론 내 주위 사람들도 아무도 보지 않았을 영화가 주로 다뤄져 있고, 게다가 '성역'이니 '에토스'니 '르상티망'이니 하는, 뭔가 뭔지 모를 용어로 설명되어 있었다. '안녕. 너희들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무식한 나를 용서해다오.'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가를 떠나 도서관에서 나왔다. 시간이 조금 남아..

underline 2023.05.17

[밑줄] e를 π와 i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

2008/05/01 14:01 eπi+1=0 e를 π와 i 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박사의 메모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순환하는 수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가 간결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에 착지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곁으로 내려와 수줍은 많은 i 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오일러의 공식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유성의 빛이었다. 어둠의 동굴에 새겨진 시 한 줄이었다. 거기에 담긴 아름다움에 감동하면서 나는 메모지를 다시 정액권 지갑에 집어넣었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지만 수학 코너는 여전히 한산했다. ..

underline 2023.05.15

[밑줄] 그날은 구름이 잔뜩 꼈다

2007/07/20 23:13 ... 거리는 묘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해변에도 사람은 그림자도 없고 갈매기만 눈에 띄었다. 레스토랑의 테라스는 대낮에도 텅텅 비어 있었다. 성벽 매표소, 보트 대여점, 빙수가게, 관광 택시 회사, 사람들은 어디서나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멍하니 있었다. 비수기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일찌감치 장사를 접은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한산한 해안 길에 내리쬐는 햇빛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날은 구름이 잔뜩 꼈다. 낮인데도 새벽 같았다. 태양은 보이지 않고 푸르스름한 회색 구름이 겹겹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바다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분이 음산해지는 색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은데 순수하고, 풍경 전체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마치 숨을 쉬듯 꿈틀 거렸다..

underline 202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