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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날은 구름이 잔뜩 꼈다

flipside 2023. 5. 13. 11:23

2007/07/20 23:13

 

... 거리는 묘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해변에도 사람은 그림자도 없고 갈매기만 눈에 띄었다. 레스토랑의 테라스는 대낮에도 텅텅 비어 있었다. 성벽 매표소, 보트 대여점, 빙수가게, 관광 택시 회사, 사람들은 어디서나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멍하니 있었다. 비수기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일찌감치 장사를 접은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한산한 해안 길에 내리쬐는 햇빛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날은 구름이 잔뜩 꼈다. 낮인데도 새벽 같았다. 태양은 보이지 않고 푸르스름한 회색 구름이 겹겹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바다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분이 음산해지는 색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은데 순수하고, 풍경 전체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마치 숨을 쉬듯 꿈틀 거렸다. 수평선 언저리에만 길쭉한 띠 같은 하늘이 간신히 보였지만, 그것조차 밀려오는 구름의 무게에 짓눌려 버릴 듯했다. 바위에 앉아있는 갈매기도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날아오르기를 주저하는 듯했다.
  우리는 유람선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갑판에 넘쳐나도록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인 듯한 보건소 관리인이 선실 창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커피 파는 아저씨는 카운터에 나와 뱃머리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 외에는 달리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유람선을 탄 듯한 관광객 몇 명이 있는 정도였다. ...



[호텔 아이리스] 중에서, 오가와 요코, 김난주 옮김, 이레, 2007




어머니와 함께 관광지에 있는 호텔에서 카운터 일을 보고 있는 17살 소녀와 가까이에 있는 섬에 혼자 살고 있는 아버지뻘 되는 한 번역가의 사도-마조히즘 방식의 사랑이야기로 한 줄 요약할 수 있는 소설이지만, 정작 눈에 들어온 것은 위와 같은 무심하고, 조용한, 그래서 나른하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풍경의 묘사였습니다. 유람선 갑판에서 바라본 풍경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마치 내 자신이 그곳에서 음산해지는 하늘 색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오가와 요코 작품은 - 이 작품만큼이나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 소설집 [임신 캘린더]와 [미나의 행진] 밖에 읽지 않았는데, 만약 [미나의 행진]이나 [박사가 사랑한 수식]만 읽으신 분이라면 화들짝 놀라실 것 같다는 생각드네요. SM이나 성애에 대한 묘사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다른 책들이 있으니 - 예를 들면 와타나베 준이치의 [샤토 루즈]나 무라카미 류의 여러 작품 - 오가와 요코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본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시는게 어떨까 합니다.




p.s. 원서와 번역본 표지.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