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4

소설의 첫 문단 (14)

2012/09/02 21:33 9월말의 그 밤, 산장 2층 정면 침실에 있는 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찡할 정도의 가정적인 분위기가 눈에 비칠 것이다. 난로에서 훨훨 타는 장작의 희미한 빛에 네 기둥이 달린 구식의 큰 침대에 누워 있는 필립 웨더비와, 그 옆의 작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그 아내의 모습이 보였을 게 틀림없다. 차근차근히 살펴보면 볼이 붉게 물들어 있고 숨이 가쁜 것으로 미루어보아 필립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조금은 선망의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여자의 근심스러운 듯한 눈, 가끔씩 남편의 이마에 땀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는 다정한 손길, 그리고, "주무세요, 필, 주무세요."라고 중얼대는, 가슴 깊은 ..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13)

2012/04/26 00:14 파리는 4월이다. 빗발도 한 달 전만큼 차갑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까짓 패션 쇼를 보기 위하여 비에 젖으면서까지 나서기에는 너무 으스스하다. 비가 멎기까지는 택시잡기도 쉽지 않거니와, 비가 멎는다면 택시도 별볼일 없다. 기껏해야 몇백 야드밖에 안되는 거리인 것이다. 어쨌든 마땅치가 않다. - 심야 플러스 원, 개빈 라이얼, 최운권 옮김, 해문출판사, 2004 린들리씨는 올드크로스 마을의 첫 담임 목사였다. 이 작은 부락의 시골집들은 마을이 생겨난 이래 늘 평화롭게 둥지를 틀고 있었으며, 마을사람들은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면 작은 길과 농장을 지나 2, 3마일을 걸어 그레이미드의 교구 교회로 가곤 했었다. - 목사의 딸들, D. H. 로렌스, 백낙청 옮김, 창작과비평사,..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12)

2012/02/26 19:33 거무스름한 어둠 속으로 복도의 백열등 불빛이 흘러들어왔다. - 심홍, 아카가와 지로, 임은경 옮김, 서울문화사, 2010 잠결이었다. 아련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그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송수화기를 떨어뜨릴 듯 잡고는 여보세요, 중얼거렸다. 저쪽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어디의 누구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 빨래터, 이경자, 문이당, 2009 칙칙한 검은색 타이어와 녹슨 체인, 손때와 빗물에 얼룩진 핸들과 도색이 벗겨진 벨. 그런 부품들로 이루어진 자전거가 잡초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다. - 오아시스, 이쿠타 사요, 김난주 옮김, 황매, 2005 자명종 라디오는 정확히 아침 뉴스 ..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11)

2011/12/12 23:35 "다 왔다! 어휴, 힘들어!" - 로맨틱가도 살인사건, 아카가와 지로, 임은경 옮김, 서울문화사, 1997 1963년 여름. 나는 프티고아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리고아브는 포르토프랭스에서 서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다. 남부 국도를 따라 가노라면 타피옹 산이 나오는데, 이 산을 돌아 넘으면 바로 프티고아브가 있다. 트럭(보나마나 당신도 트럭으로 여행할 테니까)을 몰고 가다가 경비대 막사(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앞에서 조용히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시라. 그런 다음,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면 라마르 가 88번지에 이르게 된다. - 커피 향기, 다니 라페리에르,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 1994 두광인頭狂人은 자택의 자기 방에 있다. 4LDK 분양맨션에 속한..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10)

2011/11/27 12:21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 나카노네 고만물상, 가와카미 히로미, 오유리 옮김, 은행나무, 2006 어느 날 부인이 안으로 들어선 것은 판유리벽을 통해 [장미빛 누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코트 걸이 위에, 흔히 젊은 여자 모델의 오만한 잿빛 시선이나 광기가 번득이는 듯한 까만 눈동자와 마주칠 법한 곳에,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풍만한 알몸을 육감적으로 곱게 내뻗은 여인의 누드가 걸려 있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부인은 생각했다. 요즘은 완숙한 여인을 표현한 그림이나 사진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젊은 여자들 모습뿐인데 말이다. 장미빛 나부(裸婦)는 아주 단조로운 색감으로 그러졌는데도 양감이 있었다. 커다란 궁둥이, 슬며시 들어올린 당당한 한쪽 무릎. 둥글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원(圓..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9)

2011/11/24 23:03 깊은 밤, 주위에 고요한 정적이 흐를 때면 의자에 깊숙이 걸터앉아 눈을 감곤 한다. 그때 떠오르는 것은 도장이라도 찍은 듯 항상 똑같은 광경이다. - 신세계에서 1, 기시 유스케, 이선희 옮김, 시작, 2010 다시 병원이다. 사람 없는 긴 복도에 나의 발소리가 느리게 뚜벅뚜벅 울렸다. 나는 병원이 싫고 병원 냄새도 싫었다. 새로 칠한 광택제가 빛나는 장식 없는 나무 널도, 먼지 없는 창틀도, 엄마와 함께 허겁지겁 지나가는 내 뒤틀린 모습을 비추는 크롬 광선도 싫었다. 나는 낯선 곳을 방문한 꾀죄죄한 다섯 살 꼬마였다. - 니웅가의 노래, 샐리 모건, 고정아 옮김, 중앙북스, 2009 목을 매단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내가 겨우 다섯살이었다는 게 다행이다. 열 살이었..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8)

2011/09/09 01:13 콜필드의 여름밤은 정말 기분이 좋다. 헬리오트로프와 재스민, 그리고 인동덩굴과 클로버의 향기가 난다. 이곳에서는 별빛도 따스하고 부드럽다. 전에 있던 곳처럼 차갑거나 쌀쌀하지는 않다. 아주 낮게 우리들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열어젖뜨린 창문의 커튼을 흔드는 미풍은 갓난아기의 입맞춤처럼 부드럽고 촉촉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무성한 나뭇잎들이 자다가 몸을 뒤척이고, 다시 잠에 빠지는 것처럼 서로 스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푸른 잔디밭 위를 흐르며 잔디를 자른 흔적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는 정적이, 완전한 평화와 평온함과 고요가 있다. 정말 콜필드의 여름밤은 기분이 좋다. - 죽은자와의 결혼(1948), 윌리엄 아이리..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7) - 포와로 등장 소설

2011/07/24 11:16 '스타일즈 저택의 사건'으로 당시 세간에 일었던 격심한 관심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사건에 따랐던 엄청난 구설수 때문에 줄곧 나는 친구인 포와로와 스타일즈 저택의 식구들로부터 그 사건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왔다. 나는 이 글이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항간에 떠돌고 있는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진정시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 애거서 크리스티,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92 나는 소설의 첫머리를 강력하고 기발하게 하여 미사여구에 지친 독자들의 주의를 끌려는 젊은 작가들이, "'제기랄!'하고 공작 부인이 말했다."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꽤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 - 골프장 살인사건(1923), 애거..

underline 2023.05.19

소설의 첫 문단 (6)

2011/05/10 14:27 17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은 아직 빨간 색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노란 택시들은 그 좁은 도로를 먼저 지나겠다고 앞다투어 빵빵거렸다. 나는 지금 이렇게 복잡한 도심을 헤치며 운전하고 있다. 클러치, 액셀, 변속기(중립에서 1단인가? 1단에서 2단인가?), 클러치 떼고.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지만 안정이 되지 않았다. 끽끽 브레이크를 밟아대는 차의 홍수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몰고 있는 작은 차는 교차로를 지나는 동안 두어 번이나 덜커덕거리며 비틀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덜커덕거리던 차가 제자리를 잡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발랐다. 눈으로 확인해보니 기어는 겨우 2단에 있는데 앞 택시 뒷부분이 어찌나 크게 보이던..

underline 2023.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