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6 00:35
... 잘 알려진 魯迅(노신)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感覺(감각)과 意識(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 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眞實(진실)을 보는 視力(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 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魯迅(노신)은 물론, 당시 중국의 사회와 중국인의 상태를 안타까워해서 쓴 것이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轉換時代(전환시대)의 論理(논리)]의 독자 가운데 의식의 깊은 중독증 상태에서 깨어나는 괴로움을 경험한 이야기를 나는 적지 않게 들었다. 이것이 독자에게 송구스럽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信念體係(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준 것을 사과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역할을 다소나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현실에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理性(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眞實(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책의 이름을 일컬어 [偶像(우상)과 理性(이성)]이라고 한 이유이다. ...
[우상과 이성] 서문(1977) 중에서, 리영희, 한길사, 1980
"언제부터인지 어째서인지"의 마지막 문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