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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운이 좋다'고 느끼는 일하는 여성들

flipside 2023. 5. 13. 11:11

2007/06/21 08:23

 

.. 나는 저녁 때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운이 좋다'고 느끼는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은행원이자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인,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하고 있는 한 여성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정말 '운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신없이 집안일을 해치우고,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내의 말을 거의 들어주지 않은 남편과 살고 있는 그녀가 내가 보기에는 별로 운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보통 남자들에 비해 남편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운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아내가 직장에 다닌다던가, 집안일을 '많이' 분담 한다고 해서 자신을 '운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이런 류의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반면, 내가 인터뷰한 그 은행원이나 나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여자들은 남편이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거들어주면 자신이 남보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여인들 스스로가, 남편의 배려가 드물고 귀중하다는 이유만으로 '운이 좋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곧 가정에 대한 남성적 시각과 그러한 시각을 창충하고 강화하는 직장 문화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듯 가사분담이 조화로운 결혼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 그 운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운이 좋은' 상태로 살고 있다면 그 '행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번 쯤 생각해봐야 하지는 않을까?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은 대부분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기를 원한다. 나는 가끔씩 여학생들에게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 문제에 대해 남자친구와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별로요"라고 얼버무린다. 18~22세의 발랄하고 호기심 넘치는 학생들이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리는 없다. 나는 여학생들이 그러한 문제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학생들은 그것을 '사적인' 문제로 여기기 떄문에 외로움을 느낀다. 젊은 여학생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머지않은 10년 안에, 많은 여학생들이 내가 인터뷰한 그 은행원처럼 허둥지둥 살게 될 것이다. ...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의 서문 중에서, 알리 러셀 혹실드, 백영미 옮김, 아침이슬, 2001




원제가 [The Second Shift]인 이 책의 부제는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처음 본 것이 2002년 인가 그랬는데 어찌나 보고 재미있고 감동을 받았는지... 널리 널리 이 책이 알려지길 기대했지만 제목이나 표지가 가벼운 읽을꺼리 쯤으로만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이내 인기도 없이 시들고 말았습니다.절판되고 말았습니다. ㅠㅠ (samsik 님 덧글보고 확인해보니 절판이 아니라 품절로 몇몇 인터넷 서점에서는 구입이 가능하네요. 알려주신 samsik님께 감사~) 책은 치밀하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인터뷰 내용과 사회학적 분석으로 가득차 있는데, 전체적으로 저자가 12쌍의 맞벌이 부부를 1976~88년까지 12년 동안 관찰하고 50쌍의 맞벌이 부부를 인터뷰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원서가 나온 것이 1990년인데 지금 봐도 이야기 전개나 시선은 여전히 참신하고 유효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사분담이나 남성, 여성에 대한 입장이나 생각은 이 책에 빚지고 있는 것이 큽니다. 요즘 이글루스에 이야기되는 주제와 관련해서 밑줄을 그어봤습니다. 출판사에서 혹시나 다시 이 책을 내주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도 조금 있구요. 이 책을 많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조금 있구요 ^^;




p.s. 원서표지와 페이퍼백 표지에 있는 일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