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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결혼이란 신앙하고 같은 거 아니겠어요?

flipside 2023. 5. 15. 00:57

2008/05/06 00:14

 

  "하지만 이래저래 취향이 까다롭겠어요. 당신은 예술가니까"라는 그의 말에, 나는 당나귀가 말이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고의 주변 사람들 중에 나의 특색을 '예술가'라고 표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왜죠? 왜 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경제신문에 실렸었거든요. 결혼하실 때. 난 초대를 받았지만 그때 마침 해외에 나가 있어서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경제신문에 나에 대해 뭐라고 실렸는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망스러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무려면 또 어떤가.
  "예술가는 누구와도 잘 어울려요. 예술이 있으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으니까"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전 예술가가 아니에요. 그래서 취향이 까다롭죠. 특히 사람취향이."
  "그런가요? 난 예술가가 아니라서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는데. 하긴 결혼하고 몇십 년 지나면, 남자들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는 웃었다. 나는 말하기 편했다. 나카스키 씨는 가볍게 "그러니까 저기 부군께서는 까다로운 예술가의 눈에 들었다는 말씀……?"
   "아니오, 결혼이란 신앙하고 같은 거 아니겠어요?"
  나는 포도주 대신에 미즈와리를 받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셨다. 술을 마시자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상당히 유쾌해졌다.
  "하나 둘 얏 하고 뛰어넘어서 단번에 신자가 되는거죠. 뛰어넘지 못한 사람은 언제까지고 될 수 없죠. 하지만 신앙은 자유로운 거니까……. 신자가 될 수 없다고 탓하는 것은 잘못된 거겠죠."
  "맞아요, 그래요. 하지만 서양의 유명한 사람도 말했다시피 신앙은 관습에서도 시작된다잖아요. 관례대로 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둘 얏! 하고 탄력을 받지 않은 경우도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바로 그런 경우죠."



[아주 사적인 시간] 중에서, 다나베 세이코, 김경인 옮김, 북스토리, 2007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라는 문구만 보고 읽기 시작했는는데 읽다가 이름이 낯익다 싶어서 봤더니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자인 다나베 세이코 였습니다. 영화보고 원작이 나왔을 때 책은 한참 후에 읽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어요. ^^ 판권란을 보니 [사적생활]이라는 제목의 원작이 발간된 것은 1981년. 하지만 전혀!라고 말할 정도로 새로운 느낌인 소설이었습니다. 핸드폰이 나오지 않아도 위화감이 없고 지금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다지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을 이처럼 미묘하게, 재미있게, 쓸쓸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점에 푹 빠져서 음미하듯 읽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남녀 관계에서 "파란만장한 운명보다 평벙한 일상 속에서 마음이 변해가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파란만장도 좋지만 ^^ 이런 드라마도 맘에 쏙 들었습니다. 위에 밑줄 그은 부분 말고도 기억에 남는 구절이 많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건 괜찮은 이야기, 이건 말해도 소용없으니까 하지 말자... 하고 분류하는 친절을 베푸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랑의 생활이라는 하찮는 것은 소설에서 다룰 가치가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을 빼고는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




p.s. 번역본 표지와 원서표지. 전 첫번째 원서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