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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벌써 다 알고 계신 거다

flipside 2023. 5. 15. 01:20

2008/08/28 08:23 

 

  문득 쫘악쫘악 물 끼얹는 소리가 나서 보니 야스의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등 좀 밀어드릴까요?"
  이런 데는 아주 소질이 있다. 나 같은 인생을 살아온 여자는 특히 더.
  타일을 새로 붙인 욕실의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뜸 자국이 얼룩덜룩한 등을 밀고 있자니 야스의 어머니가 물었다.
  "너희 집에서는 뭐라고들 하시니?"
  "예, 제 몸이 벌써 이렇게 됐는데요. 뭐……."
  "아직 말씀 안드렸구나."
  "일단 교토에 돌아간 다음에 적당한 시기를 봐서 이바라키 친정에도 인사를 가겠다고 했어요."
  "얘야, 만약에 친정에서 반대하시면 둘이서 도망가거라. 내가 야스 주려고 모아놓은 돈이 100만 엔쯤 되니까 그걸로 미국이든 어디든 멀리 도망가. 그렇지만 큰애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 그걸 알면 길길이 화를 낼 거야. 야스에게는 한 푼 도 줄 수 없다고 그러거든."
  하나로 묶어서 늘어뜨린 백발이 섞인 머리. 정수리 부분이 훤했다.
  "야스의 어디가 그렇게 좋던?"
  이게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지.
  "그러니까…… 저기, 착실하니까……."
  천천히 돌아다보는, 햇볕에 그을린 주름투성이 얼굴이 무서웠다.
  "착실하지. 우리 야스가 착실하고말고. 얘야, 내가 부탁하마. 절대 야스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그럼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벌써 다 알고 계신 거다. 남들은 다 속여도 역시 같은 여자니까…….
  "나는 아무 상관 없어. 배 속의 애가 누그 애든지. 야스가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지. 내가 젊은 여자라고 해도 야스 같은 녀석에게 반하지는 않았을 거야."
  "……."
  "여자들이 야스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지. 늘 우물쭈물, 어디 맺고 끊는 데가 있어야지. 참,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지만……. 그렇지만 얘야,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잘 살아야 돤다. 응?"
  "……."
  "그래도 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착한 아이였단다. 그게 아마 그 애가 중학교 1학년 때니까. 왕복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매일 와서 내 몸을 닦아주곤 했지."
  어머니는 수건에다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얘야, 꼭 부탁하마. 야스를 버리지 말아다오. 너를 만난 걸 얼마나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목욕탕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조아리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부탁한다. 헤어지지 말고, 참고 잘 살아다오."
  나도 덩달아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용서해주세요. 열심히 잘 살게요."
  천장에 달린 높고 넓은 창에서 달빛이 흘러 들어오고 어디선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나로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가마타 행진곡] 중에서, 쓰카 고헤이, 박승애 옮김, 노블마인, 2008




예전에 연극 [아타미 살인 사건]을 재미있게 봤던 터라, 작가 이름을 보고 큰 생각없이 골라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 소개 문구를 보고는 엑스트라의 비애를 그린 코믹한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읽다보니 어찌나 분통이 터지고 답답해지고 주인공의 행동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냥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기분과는 관계없이 책은 술술 잘 읽혀졌습니다. 기고만장에 안하무인 영화배우 긴짱과 그 재수없는 인간을 거의 종교수준으로 추종하는 엑스트라 야스, 그리고 긴짱의 아이를 임신하고 야스와 결혼하는 고나쓰(밑줄 부분은 고나쓰가 야스 부모님에게 인사를 간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긴짱의 무개념한 행동에 분노하고 야스를 동정하다가, 어라? 야스는 이걸 그냥 받아들이면서 흉내까지 내잖아! 하면서 당황하고... 결국 주요 등장인물 세 명 중 누구하나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어 읽는 내내 힘들었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만 그냥 보면 뉴스만 봐도 짜증이 나는 세상인데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까지 안좋아지면서 읽을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지만, 이들 관계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단순한 답답함의 차원을 넘어서는 작가의 날카로움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86회 나오키 상 수상작.




p.s.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작가의 인터뷰가 있어 링크 걸어둡니다. : 국내서 장편소설 출간 재일동포 극작·소설가 쓰카 고헤이 (인터뷰 마지막말이 "난 아직 소설엔 서툰 사람이다." Orz)


p.s. 번역본, 원서표지, DVD 표지. 영화화 되었다는데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