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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러니까, 지배해 버리고 싶다는 겁니다

flipside 2023. 5. 16. 19:13

2009/06/25 08:05

 

  "아마, 저는 어떤 종류의 독재자를 동경하는 걸 겁니다."
  야리나카는 말했다. 여의사는 다소 당황한 듯이 눈을 깜빡이며,
  "독재자……."
  "말이 과격합니까?"
  "어떤 의미인가요?"
  "60년대 이후 일본 현대 연극의 '언더그라운드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게 있습니다. 많든 적든 현재에도 그것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죠. 그중에서도 '집단 창조'라는 개념이 60년대에서 70년대, 그리고 현재를 잇는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말하며, 연극을 만드는 집단에서 누구나 작가이고 연출가이고 배우이기도 하고 스태프이기도 한, 신분의 동위성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입니다. 요는 극단 내의 계급제도를 걷어치우라고 하는 겁니다.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지요. 강력한 지도자는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배우들 개개의 자립성이다, 라고."
  야리나카는 안경을 다시 쓰고 천천히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그게 싫어서. 그래서 뭐, 독재자라는 단어가 나와버렸습니다."
  "네."
  "그러니까, 지배해 버리고 싶다는 겁니다, 세계를. 아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정치에는 흥미가 없고, 속된 말로 권력을 바라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다만 한 연출가로서, 자신이 연출하는 무대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찾고 있는 '풍경'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중에서, 아야츠지 유키토, 한희선 옮김, 시공사, 2008




OO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아야츠지 유키토의 가장 최근 - 이라고 하지만 작년 11월 - 번역된 작품인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을 읽었습니다. 계속 한스미디어에서 십각관, 시계관, 암흑관 순서로 나오다가 1년의 시차를 띄고 이번에는 시공사에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 보면 올 10~11월에는 새로 번역되는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


이전에 십각관으로 시작해서 시계관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작품도 기대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두 작품과는 분위기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역시나 재미있게 봤습니다. 줄거리는 연극 극단 멤버들이 폭설을 피해 머물게 된 키리고에 저택이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범인 찾는 즐거움 외에도 배경이 되는 키리고에 저택의 스산하고 기묘한 느낌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 저택이 살인을 예고한다? 라던가 하는 식의 - 여름에 읽을만한 적당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점이나, 동요의 내용과 비슷한 형태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는 점, 위에 밑줄 친 부분처럼 연극이나 공예,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점,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밝혀지는 범인 등 기본적인 추리소설로의 충실함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요 등장인물인 극단단원 8명에게 모두 본명이 있고(중간에 이름을 바꾸는 사람도 Orz) 거기에 함께 눈을 피해 저택에 머무는 노의사, 저택의 주인과 고용인들 몇 명... 이렇게 거의 20개가 넘는 이름의 홍수에 빠져서 누가 누군지 제대로 구분못하고 처음에 혼란스러워 했다가, 한 명씩 사람이 죽어가면서 조금씩 이름들에 적응해 갔습니다. 일본 추리소설 읽으면서 이름 헷갈리시는 분들은 고생 좀 하실듯~ : )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p.s. 번역본 표지의 성은 궁금해서 찾아보니 프랑스의 샹보르 성이랍니다.([출처] 키리고에 저택에 관한 잡담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작성자 다롱이). 표지의 각도와 비슷한 사진을 찾아봤어요~ [출처1] [출처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