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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모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flipside 2023. 5. 16. 19:17

2009/09/06 15:19

 

이사와 사토시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돌려드릴게요. 땀으로 더럽혀지면 죄송하니까."
모자를 벗어서 내밀었다.
"그렇지만 모자가 없으면……."
"괜찮습니다."
이사와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꺼내서 머리에 썼다.
그런 것으로는 이 햇볕에 어림도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사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받아든 모자를 바로 뒤, 비닐 시트 끝에 놓았다.
그리고 그날 돌아올 때까지 모자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모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채굴장으로] 중에서, 이노우에 아레노, 권남희 옮김, 시공사, 2009




처음 국내에 출간된 단편집 [어쩔 수 없는 물]을 읽으면서 무척 마음에 드는 작가지만 아마 이 단편집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라서 후속작이 번역되기는 어렵겠구나...Orz 했었는데 다행히 작가가 작년에 나오키상을 받아서 그 수상작이 출간되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평이한데, 작은 섬에서 화가 남편과 큰 사건없이 잘 지내고 있는 주인공 양호선생님이 새로 부임한 음악선생님 이사와 사토시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야기... 라고 한 줄 요약 가능합니다. 앗 또 불륜인가? 이런 이야기 너무 많지 않아?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노우에 아레노가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섬세하고 특별합니다. 밑줄 그은 부분은 개인적으로 그 감정의 묘사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는데, 그 사람이 썼던 모자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했다는 마지막 한 줄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마치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는 뒷모습으로도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심심하고 이게 사랑?인가 갸우뚱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일본 아마존의 독자평을 보다보면 사투리(소설의 무대가 되는 섬은 그냥 남쪽의 섬이라고 되어 있어요)가 나오는 부분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칭찬이 많은 편인데(특히 양호실에서 이사와 선생님을 치료해주는 장면) 번역본에서는 사투리가 모두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되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주인공이 사투리를 사용할 때와 표준어를 사용할 때의 차이가 있어서 사투리의 번역은 중요한데 옮긴이의 말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좀 아쉬웠어요.


p.s. 번역본과 원서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