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line

[밑줄] 내일이 있다고 믿는 마음

flipside 2023. 5. 17. 21:36

2009/09/24 14:04

 

내일이 있다고 믿는 마음은 사십 년이 지났건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소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엄마와 할머니랑 오쿠타마奧多摩에 있는 여관 별채에서 보냈다. 큰 병을 앓은 탓에 요양을 겸해서 가 있었는데, 개학을 하루 앞두고 도쿄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다. 구구단을 외워 오라는 여름방학숙제를 떠올렸던 것이다.
  도쿄에서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이이는 사, 이삼은 육, 하면서 도쿄까지 가는 차 속에서 구구단을 가르쳐주었다.
  "이 주변은 하토노스鳩ノ巢(다마강多摩川의 30대 절경 중 하나인 계곡)라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말을 흐느껴 울면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새 프로그램의 기획회의나 대본 상담을 위해 방송국으로 향할 때면, 전날 밤까지 놀아버린 벌로 아무 준비도 못해, 우리동네 아오야마에서 방송국이 있는 아카사카赤坂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차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야기할 내용을 궁리한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오쿠타마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먹이며 외웠던 구구단이다. ...



'덧없이 지는 벚꽃'중에서, [아버지의 사과편지], 무코다 구니코, 곽미경, 강, 2008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안심을 하게 되면서도, 이 사람은 그 짧은 시간에도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작가잖아!하는 생각에 다시 좌절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Orz 2007년 번역되어 나왔던 나오키상 수상작 [수달]이 큰 반향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는 무코다 구니코 책을 못읽겠구나.. 했는데 이렇게 에세이집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책은 한 편 한 편 한 줄 한 줄이 다 가슴에 와 닿는데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제목처럼 아버지와 가족, 어린시절 추억이 이야기의 중심인데 특히나 이런 대목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지요. "자기 부모가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는 것은 꽤나 마음이 복잡해지는 문제다. 어쩐지 열없어진달까, 당황스럽다고 할까. 이상하고, 슬프고,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한다." 로알드 달 소설이 계속 나왔던 것처럼 다른 에세이집도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 바람이 실현될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읽은 가장 좋은 비소설 책으로 꼽아도 될 정도의 작품으로 다들 읽으시고 따뜻한 기분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p.s. 처음에 밑줄 그었다가 바람피는 이야기를 개에 비유했다는 것이 좀 걸려서 p.s.로 적어요. ^^


우리 집 개를 두고 다른 집 개를 귀여워하는 것은 조금 켕기는 일이긴 해도 거기엔 떨치기 힘든 묘한 재미가 있다.
나는 가끔 우리 개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집 개를 쓰다듬거나 데리고 놀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하다못해 간지럼 하나를 태우더라도 우리 집 개보다 더 귀여워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서 미묘한 반응의 차이를 맛보는 것이다.
상대 강아지도 주인의 눈을 피해 의외로 대담하게 한순간 교태를 보이다가, 주인 눈에 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을 한다. 바람을 피우는 재미란 이런 것일까 하고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 '콧대 신사록'중에서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원제는 父の詫び状(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