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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이 남자는 겁쟁이였던 것일까?

flipside 2023. 5. 17. 21:45

2009/11/05 00:12

 

... 잭이 교도소 내 교육의 일환으로 중등교육 자격시험을 준비했을 때 역사 과목을 공부하면서 한 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캐닝이던가 캐슬리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역사 과목에 C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살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다. 이 수상은 사람들의 의심과 경멸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자살을 막으려고 지속적인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면도칼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혼자 자거나 목욕을 하도록 놔두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의 선택을 모조리 앗아가버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결심을 강요한 셈이 되었다. 경호원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종이 자르는 칼로 자기 목구멍을 후벼팠다.
  이 남자는 겁쟁이였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가 겁쟁이의 탈출법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이 자르는 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가늠해보지 않았다면 감히 그를 겁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 뭉툭한 칼끝을 숨통에 대보지 않고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라.
  마음을 추수르고 일어나 잭은 새 면도칼로 면도를 했다. 칼날을 안쪽으로 향하게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을 쓸어보았다. 편안한 예리함이 느껴졌다. 날이 너무 잘 서 있어서 조심해야했다. 면도기는 그의 살을 베고 싶어 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면도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잭은 죽음에 대한 선택과 이토록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는 어지러운 가능성을 강하게 느낀다. 갑자기 경정맥을 베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다. 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그는 더욱 강인해짐을 느낀다. ...



[보이A] 중에서, 조나단 트리겔, 이주혜·장인선 옮김, 이레, 2009




책 날개에 있는 여러 찬사 중 "독자들에게 생각해볼 거리를 무수히 던져 주고 있다"는 부분에 깊이 공감합니다. 400쪽이 채 되지 않는 소설이 이토록 많은 주제를 말끔하면서 감동적으로 이야기하다니 정말 이런 책 오랜만에 만나봅니다. 소년범죄부터 시작해서 가족, 아버지와 아들, 교화란 무엇이고 속죄란 가능한 것인지, 또 인성이란 어떤 것인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끊임없이 독자에게 물어봅니다. 감정기복 없이 쉽고 조용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으면서도 고함소리보다도 더 크게 가슴을 울린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을 읽기 얼마 전에 [천사의 나이프]를 읽었는데, 단순화시키면 [보이A]는 소년범죄의 가해자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고 [천사의 나이프]는 피해자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서 둘을 모두 읽으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바로 읽고나서는 감정에 휩쓸려 몰랐지만 좀 시간을 두고 곰곰 생각해보면 어쩜 이렇게 완벽할 정도로 매끄럽게 소설을 구성하고 이야기의 앞뒤를 맞춰놨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아마 그 핵심은 마지막 장이고 그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묘사가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p.s. 영화는 예고편밖에 못봤지만 소설의 문장 하나 하나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아! 개봉했을때 소설을 읽었을면 좋았을것을... Orz)


p.s. 밑줄 친 부분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외무장관과 하원의장을 지낸 캐슬레이(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입니다. 실제로 편지칼(letter opener)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링크1], [링크2]


p.s. 번역본과 원서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