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28 00:57
2003년 07월 11일
[헐크 Hulk] 심각한, 심각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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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에 셰익스피어의 [타이투스 앤드로니쿠스]를 연극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복수극의 대명사라는 말에 어울리게 전체적으로 피가 난무하는 작품이었는데, 주인공인 타이투스가 손목을 자른 장면에서는 없어진 손을 붉은 손수건이 대신하는 식의 설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타이투스가 그 붉은 손수건을 빼먹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주인공 맡으신 분은 그것을 모르고 연기에 열중하시다가, 슬그머니 그 손을 소매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연기를 하시더군요. 2막에서는 다시 붉은 손수건을 들고 나왔지만 관객들 중 일부(저를 포함한 ^^v)는 연극의 진지한 내용이나 줄거리에 관계없이 손수건의 행방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헐크]에 있어서 이런 붉은 손수건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 헐크의 바지일 것입니다. ^^ 우리 어릴 적 TV 시리즈 [헐크]를 보면서 '신발이나 티셔츠는 다 찢어지는데 바지는 그대로야!'하면서 의문을 떠올렸던 기억 다 있을 것입니다. 함께 영화를 보는 내내 제오른편에 앉아있는 팀들은 헐크 바지의 신축성이 나올만한 장면이면 끊임없이 웃음을 떠뜨렸습니다. '어? 이번에는 찢어졌나보네…', '이번 바지는 좀 늘어날 만 하다' 등등. 원래 다들 웃으라고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잘 몰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상황에 관계없이 웃음이 나올 만한 장면이 꽤 있습니다. 헐크가 [매트릭스 2]의 네오처럼 슈퍼맨 놀이를 하듯 날아다니는 장면이나 [해리 포터]의 한 장면을 떠올릴 법한 사진 장면들은 조금 어이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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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리즈 [헐크]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오겠지만, 예전에 그것을 본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들에게 영화 [헐크]는 불만투성이의 영화로 다가옵니다. '아니 지가 무슨 슈렉이야 고질라야?' ^^ 라는 후기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괴수에 가까운 크기에 대한 다소 애교 섞인 불평이지요. '지루하다', '돈이랑 시간이 아깝다'는 불만이 영화 관련 게시판에 가득한 것을 보면 [헐크]가 우리가 기대했던 류의 영화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아마 영화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시간 20분이라는 상영시간을 떠나 전반적으로 [헐크]는 다른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 ― 최근에 나왔던 [스파이더 맨]이나 [데어데블] ― 와는 달리 무척 고민 많은 주인공들 투성입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주인공 브루스 배너(에릭 바나 분)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브루스의 아버지(닉 놀테 분),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는 베티 로스(제니퍼 코넬리 분)... 특히 브루스의 출생의 비밀이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겹쳐지면서 무슨 가족 갈등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주인공들은 초반기에 잠시동안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심각합니다. 대부분의 영웅 만화영화 주인공들이 트라우마를 빨리 떨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 노력하는 데 비해 우리의 헐크는 오이디푸스처럼 마지막까지 운명을 등에 지고 있습니다. 또한 악당의 설정이 다소 흐릿한 것도 아쉽습니다. 선과 악이 1:1 이나 1:多의 구도로 설정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악당으로 설정된 글렌 탈보트(조쉬 루카스 분)가 너무 어이없다는 점 ― 오히려 코믹하다는 느낌 -.-;; ― 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후반부에 아버지가 새로운 악당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다소 외전 같은 느낌이 들었답니다.
이런 저런 단점과 기대와 다른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름대로의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사랑과 영혼]의 데미 무어를 떠올리게 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제니퍼 코넬리를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광기 어린 과학자 연기를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하게 해낸 닉 놀테의 연기도 괜찮았고, 각도에 따라서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헐크 역의 에릭 바나 역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또한 마블 코믹스의 서체와 설정을 그대로 따온 오프닝 장면과 마지막 크레딧 등의 표현은 [스파이더 맨]의 거미줄 오프닝보다 한층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하겠지만 영화 중간 중간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화면분할 장면들은 단지 만화적인 설정 이상으로 기능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긴 영화시간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재미를 줍니다. "이런 기술로 편집되었어요"라고 드러내 놓고 이뤄지는 화면전환 역시 시각적인 즐거움 ― 어떤 이들에게는 유치함으로 ― 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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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 생각하면, 저는 그가 운이 무척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혹시 [헐크 2]가 만들어진다면 다시 감독을 맡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CG와 실사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지 않아도 그의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부분은 여전히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영화든지 그것은 제작진 전부가 쏟은 노력의 결실이다. 내 뜻에서 비롯된 영화라 해도 반드시 내가 의도한 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계속 배우고 바로잡으면서 발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내가 직면했던 상황은 해가 바뀔수록 다 복잡해지고 내가 겪었던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타성에서 벗어나 더욱더 노력을 경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작품이 좋으냐 아니냐는 대개 운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관객의 느낌, 작품의 설득력, 제작자의 예정된 운 같은 것들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것들은 제작자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영화를 만들고 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건강하게 쓸모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헐크로 다시 우리 곁에 온 이안 감독", [리더스 다이제스트] 2003.07 105쪽
p.s. TV 시리즈 [헐크]를 기억하시는 분들! 맥기라는 기자 기억나시나요? 헐크의 정체를 캐내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