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미궁에 대한 추측 | 이승우

flipside 2023. 5. 31. 22:03

2007/01/07 15:31

 

1995년 10월에 썼던 글입니다. 지금 옮기면서 고칠 부분이 많구나 ㅡ.ㅡ 했지만 그대로 적어 봅니다. ^^




미궁에 대한 추측 - 이승우의 소설에 대하여




서점에 들러서 소설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단지 누구누구의 소설이란 이유만으로 손이 가는 작가가 누구에게나 한 명 쯤 있기 마련이다. 그 소설가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있었으며, 신작이 나왔다면 반드시 읽어 보기를 원하게 되는 그런 소설가를 말이다. 대개 그런 작가는 그리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고 또 다작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을 수 있다.


작가 이승우는 나에게 있어서 그런 소설가이다. [에리직톤의 초상]이라는 종교소설(이승우는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로 우리에게 처음 다가선 그는 뒤이어 [따뜻한 비], [생의 이면]을 잇달아 내놓았고 단편소설집으로 [그의 수렁], [세상밖으로], [日飾에 대하여],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미궁에 대한 추측]을 발표하면서 중견소설가의 자리를 굳혔다.


흔히 종교소설하면 떠올리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비견되는 [에리직톤의 초상]은 작가의 첫작품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소설이다. 도식화된 신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수직(신과 인간)과 수평(인간과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단순한 이분번이 아닌 다양한 삶과 여러 모순의 어우러짐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그는 "데뷔작이 거느리고 있는 개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 후 발표된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노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연애소설 [따뜻한 비],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며 성(聖)과 속(俗)의 세계에 펼쳐진 살인의 열기"를 그려나가는 그의 첫번째 추리소설 [황금가면]을 발표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한 패러디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단편소설 '세상밖으로', 주인공 소설가의 번역작품과 연계되서 진행되는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방식의 글쓰기를 기도한다.


이런 그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서 우리들이 찾는 것은 체계적이면서 논리적이며 정선된 언어와 심오하면서 예리한 내면적인 성찰이다. 흔히 "종교적 문제의식"과 "시대적 고민"을 결합시켰다고 평가받는 소설의 주제의식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연애소설에서도, 또 흥미를 위주로 한 추리소설에서도 어쩔 수 없이 부분 부분 드러난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생의 이면]은 그런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추리소설과 액자소설구조를 취하고 있는 소설은 한 소설가의 생애를 추적하는 형식을 통해 주인공의 감추어진 시절에 접근하면서 화자와 연관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도 그는 개인과 거대한 힘을 지닌 운명과 현실을 그려냄으로써 종교적 문제의식을 형상화했으며, 액자소살을 통해 흥미로운 성장소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승우의 소설가로서의 진면목은 - 진지한 주제를 흥미로운 구성을 통해 드러내는 - 그의 창작집에서 잘 드러난다. [미궁에 대한 추측]이라는 창작집에서 그는 크레타섬의 미궁을 둘러싼 여러 해석을 드러내는 '미궁에 대한 추측'과 유년시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소설가의 이야기 '동굴', 부족시대를 배경으로 권력의 의미를 재조명한 '해는 어떻게 뜨는가', 동생 교도소 면회를 통한 일상의 삽화 '일기', 권태로운 일상생활에서의 도피욕구를 그린 '선고', 절대권력에 의문을 가진 한 소설가의 우울한 종말을 그린 '수상은 죽지 않는다'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주제의식을 펼쳐나간다.


자신에게 특별한 기억이 있는 음악이나, 유난히 기억에 남는 시들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당연한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따뜻한 비]라는 가벼운 연애소설부터, 아니면 묵직한 [에리직톤의 초상]부터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만나기를 권하는 것은 그런 인간의 속성에 다름 아닌 것 같다.




p.s. 10년이 지난 책이지만 지금 봐도 표지가 멋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