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23 13:22
[책을 읽고 나서]
지난번 박길웅 작고 30주기전을 보고 나서 작가에 대한 책을 읽어봐야지.. 하고 찾다가 알게 된 책입니다. 책의 부제는 "우리 화가를 키워낸 열 명의 아내 이야기"로 김향안(김환기), 박래현(김기창), 박인경(이응로), 류민자(하인두), 최성숙(문신), 김복순(박수근), 이남덕(이중섭), 이순경(장욱진), 박경란(박길웅), 곽옥남(양수아) 이렇게 10명에 대한 이야기와 생존해 계신분의 경우 인터뷰 피쳐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10명을 크게 화가의 아내이면서도 예술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룬 5명과 자신의 꿈을 접고 남편의 예술세계 발전을 위해 헌신한 5명으로 나눠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분들이 모두 어렸을 적부터 화가나 예술가의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그림 배우려고 화가를 찾아갔다가 그 화가랑 결혼하고.. 같이 미술공부를 하다가 결혼하고...) 결국 그분들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거나 여러가지 상황으로 만족스럽게 펴지 못한셈인데, 저자는 이런 화가 아내들의 작품이나 풀어놓는 이야기를 통해서 화가 아내들의 삶과 보통 인간으로서의 고민, 욕망, 좌절과 의지등을 잘 읽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 그냥 넘어가기 힘든 - 이야기 하나는 말해줍니다.
... 논문을 쓰기 위해 여성과 미술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중, 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내가 '미대에서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은 여학생인 반면 왜 전업화가로 이름을 날리는 화가는 대부분이 남성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내가 만났던 한 여성 미술평론가는 '70, 80년대 여성작가들이 결혼과 동시에 전업화가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보이는 공통된 현상'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들은 30, 40대에 접어들어 아이들이 웬만큼 성장하고 생활도 안정되면 자기만의 '아틀리에'를 구축한다고 한다. 그러고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아틀리에에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저녁 일곱 시에 '퇴근'하기를 매일 반복하는데, 이러한 반복적 행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엄격하고 엄숙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틀리에에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는 그림이란 게 단지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이거나 풍경화 일색이라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그린 그림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정작 그들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피맺힌 채 떨어져버린 꽃잎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보여준 예술은 벽에 걸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업은 자기와의 치열한 대결이었고, 그들의 작업실은 여성이기에 예술에서 한 발짝 밀려났던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과 고군분투하는 전쟁터였다. 그들의 반복적인 '출퇴근 시스템'은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표현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자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뼈를 깎는 고행의 과정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그들이 만들어 낸 '꽃이나 풍경화'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들이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과 '태도'가 아닐까. 여성이라는 삶을 살았기에 취한 행위들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이지 않을까. '그들의 예술'은 기존의 예술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이 책은 이 같은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 선' 여성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 선 여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리고 난 '화가의 아내'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
위에 옮겨적은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명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보다는 -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작가들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거든요 -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 선' 여성들에 관점을 맞춘 책이라는 것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책의 만듬새도 훌륭하고, 도판이나 사진 배치도 눈의 띄는 괜찮은 책이라는 점도 덧붙입니다.
[서지정보]
제목 : 화가의 빛이 된 아내 : 우리 화가를 키워낸 열 명의 아내 이야기
지은이 : 정필주
출판사 : 아트북스
발간일 : 2006년 11월
분량 : 287쪽
값 : 15,000원
p.s. 본문에 나오는 화가의 아내들 중에 몇몇 분은 남편의 예술세계에 대한 논문을 쓰신 분도 있는데 학술정보넷에서 학술연구정보서비스 http://www.riss4u.net/ 에서 찾아서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경란의 석사학위논문은 [朴吉雄의 作品에 관한 硏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