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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 | 렌죠 미키히코

flipside 2023. 6. 2. 19:59

2007/09/03 02:24 

 

[책을 읽고 나서]


나오키상 목록 포스트를 올리면서 국내번역서를 함께 소개하는데 제91회(1984년 상반기) 나오키상 수상작은 아직 미출간이라고 했더니 어떤 분이 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셔서 [연문]이 번역된 것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장편소설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는데 표제작인 '연문'을 포함해서 5편의 단편 모음집이더군요.(그러고 보면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나 [꽃밥], [플라나리아] 등 나오키상 받은 단편집도 꽤 되는데 막연하게 나오키상 = 장편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 10년차 부부. 남편은 옛 애인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편지를 받고 집을 나갑니다. 남편의 갑작스런 가출에 당혹감은 느낀 아내는 남편을 찾아 나서서 사정 설명을 듣게 되고, 그 옛 애인에게는 자신이 아내인 것을 속이고 문병을 가지요... "연문"은 아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는데 표제작으로 삼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짜여진 이야기 전개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결말 등 빼어난 단편이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연문(러브레터)의 의미가 밝혀지는 부분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구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일찍 죽은 딸의 사위와 함께 사는 장모의 이야기를 그린 "붉은 입술"이었는데, 주인공 사위의 이야기에 잠깐 정신을 팔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도 애틋한 사랑이야기인 탓에 다섯편의 작품 중 마음을 흔드는 애정의 정도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이외에 문체가 다른 작품과 좀 구별되는 "13년만에 부르는 자장가"나 "피에로"는 작은 반전의 의미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고, 외삼촌과 조카의 사랑이야기라니 헉... 하면서 읽은 "재회" 역시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라서 가슴이 짠해 졌습니다. 이 작가의 사랑이야기가 다른 사랑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모든 등장인물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인 것 같은데, 주인공들만 다 좋게 좋게 되는 식의 마무리가 아닌, 이야기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상처를 이야기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렌죠 미키히코가 만약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소설을 쓴다면 프란체스카의 남편이나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아들, 딸들의 마음도 헤아려주고 좀 더 말할 기회를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랑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다들 뭔가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잖아! ^^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니 어떤 사랑이야기보다도 현실감있게 다가오게 되더군요. 아마 그것은 아래와 같은 배경 떄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한 부분을 옮겨 적어 봅니다.


  ... 현실 속에도 소박한 명장면이 있습니다.
  아마추어라도 우연하게 배우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표정을 보이고, 좋은 말을 할 때가 있지요.
  제가 알고 지냈던 분들의 그 얼굴과 말을…… 촬영과 녹음을 할 수 없었던 대신에 소박한 이야기의 형태를 빌려서 글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작품 속에 나오는 몇 마디 대사들은 실제로 현실 속에서 제가 직접 들은 것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제게 소박하지만 멋진 명장면과 명대사를 주신 만만찮은 아마추어 명배우들에게 제목 그대로 제가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기억에 남는 구절]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는 거야.


- '재회' 중에서


[서지정보]


제목 : 연문
지은이 : 렌죠 미키히코 [連城三紀彦]
옮긴이 : 김현희
원제 : 恋文 (1983)
출판사 : H&Book
발간일 : 2004년 12월
분량 : 262쪽
값 : 8,500원




p.s. 요즘처럼 일본소설 붐이 일기 전에 나온 나오키상 수상작들은 사실 독자들의 눈길이 머물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 [연문]이나 고이케 마리코의 [사랑], 기리노 나츠오의 [부드러운 볼] 등도 많이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p.s. 원서표지. 국내판 표지가 너무 눈에 안띄어~ 했는데 원서표지랑 비슷한 느낌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