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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친절한 교열자

flipside 2023. 5. 14. 11:15

2008/01/04 12:54

 

... 몇 해 전,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 하나를 엿본 적이 있다. 고려시대 사람의 번역문집이었던 것 같은데, 읽다 보니 문장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야 하다가, 그것이 제비과 철새가 아니라 사마귀과 곤충(버마재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문으로는 아마 당랑(螳螂)이었을 것이고, 역자는 그것을 당연히 '버마재비'로 옮겼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젊은 교열자의 귀에 버마재비라는 낡은 말이 설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것을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제비의 한 종류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버마제비'로 써야 할 것을 역자가 '버마재비'로 잘못 썼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친절한 교열자는 '버마재비'를 '버마제비'로 고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이 제비의 '원산지 버마'를 이 나라의 새로운 국호 '미얀마'로 고침으로써 '미얀마제비'라는 미지의 철새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과잉친절이 빚어낸 참사다. '버마재비'의 '버마'가 설령 나라이름이라고 해도, 필자가 '버마'라고 쓴 것을 굳이 '미얀마'로 고쳐야 할까? 그것을 고치기 전에 필자와 한 번쯤 의논할 수는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다. 마음가짐에 융통성이 없는 한, 버마재비가 어원적으로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뜻임을 편집자가 알았더라도, 이 단어가 과잉친절의 수난을 겪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버마'를 굳이 '미얀마'로 고치는 열정이라면, '아재비'라는 동남방언을 '아저씨'라는 표준어로 바꾸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사태가 그리 굴러갔다면, '미얀마제비' 대신에 '버마저씨'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미얀마제비' 추억"중에서, 고종석, 개마고원, 2006




어제 만난 분이랑 필자의 글이 이상하거나 눈에 차지 않을 경우 교정/교열을 어느 정도까지 봐야 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읽은 '미얀마제비' 이야기가 생각나서 옮겨봤습니다. 글 말미에 출처가 "한국출판인회의홈페이지 05/12/12"라고 되어 있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책에 옮겨진 내용이 고스란히 있더군요.('미얀마제비' 추억) 원래 전체적인 글 맥락은 실수를 꼬집으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니 원래 글을 읽어주세요~




p.s. 저는 필자/번역자가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단어/외국어/표현/문장을 썼으려니 하는 쪽이라서 가급적 내버려는 두는 쪽을 택하는 편이라 구분을 한다면 불친절한 쪽에 속합니다.(게으르다는 이야기기도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