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31 23:18
...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세예르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 사이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실 가닥들이 마구 뒤엉켜 아주 강하고 촘촘한 그물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그물. 이런 상상이 그를 매혹시켰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칼을 꺼내 그물을 자르고 나오는 것을 맹렬히 거부하는 사람의 심리도 매혹적이었다. 홀란드는 아마 아다의 그물에서 탈출하고 싶을 테지만, 수천 개의 작은 매듭들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선택을 했다. 그 끈적끈적한 그물 속에서 평생 동안 앉아 있기로. 그 결정 때문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그의 묵직한 몸 전체가 축 늘어져버렸다. ...
[돌아보지마]중에서, 카린 포숨, 김승욱 옮김, 들녘, 2007
[저주받은 피]를 읽으면서 스칸디나비아 추리작가협회가 주는 "유리열쇠상"(Glass Key Award)을 알게 되었고, 이 작품이 수상작이라는 정보만 알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첫장면에 나오는 여자아이 유괴사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이 겹치면서 긴장감을 더했지만 실제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유괴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 살인은? 세예르 경감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작은 노르웨이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재치가 번득이는 탐정의 수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고 하나 하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은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슬펐던 것은 주인공의 남자친구 할보르의 이야기 때문이었어요.(전 후반부 장면 읽다가 울었어요.ㅜㅜ) 작가가 이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에 대해서 애정을 갖고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탓에 잠깐 얼굴을 비치는 단역들의 심정에도 공감을 해야했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힘들어 했습니다. 사건을 딱 보자마자 범인이 누군지 알지는 못하는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을 감내할 수 있는 분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도 꼭 읽어보려구요.
p.s. 제가 좀 심각하게 쓰기는 했지만 실제로 소설은 재미있는 구석이 많아요. 아래 세예르 경감의 낙천적인 파트너 스카레의 이야기처럼 말이죠. ^^
"부인이세요?" 그가 말했다.
"아내의 마지막 사진이야."
"그레이스 켈리를 닮으셨어요." 스카레가 말했다. "경감님 같이 부루퉁하고 나이도 많은 분이 어떻게 이런 미인을 사로잡으셨어요?"
세예르는 한없이 건방진 이 말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그때는 나도 부루퉁한 늙은이가 아니었어."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소설 이야기를 생각하면 번역본 표지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