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1 10:56
"옛날 여기에 좋은 찻집이 있었지."
마사코는 전봇대 정도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롯폰기에서는 옛날 일을 말해도 소용없어요. 과거가 없는 곳이에요. 현재, 현재, 현재……. 있는 것은 언제나 그것뿐이에요. 보세요. 기억에 있는 건물이 몇 개나 있어요? 언제나 새 것, 언제나 신장개업. 새로운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어요. 스크럽 앤 빌트.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고, 그 끝없는 반복. 건물을 짓는 사람이 말한 거예요. 오래된 것은 죄악이니까요. 사람이 사는 집도 그래요. 3대가 같이 사는 집은 지금은 만들려고 생각도 하지 않아요. 15년 정도 지나면 이미 낡아빠져서 건물은 덜컹거리고 비효율적이고 살기 불편하고 비위생적이고, 어둡고 쾌적하지 않고, 다시 짓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집들뿐이에요. 모두 그러한 집으로 받은 대출금을 필사적으로 갚아야 해요. 그런 돈이 돌고 돌아 이 나라의 경제와 이 거리의 번영과 우리들의 생활을 지지해 주는 거예요. 그런 활력이죠. 이런 벤츠와 BMW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말예요. 돈은 많이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 불안이 없는 풍부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만족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상당히 비판적이군. 원래 현실 긍정파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아요."
마사코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 말했다. 차 소음 때문에 크게 말한다. "나 같은 건 이 거리의 기생충이에요. 숙주가 번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예요."
"그러나 이 상태로 욕망이 끝없이 확대되면 10년 후, 20년 후의 롯폰기는 어떤 거리가 될까?"
"의외로 다른 거리에 흡수될지도 모르지요. 롯폰기가 아사쿠사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거리는 움직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바뀌니까요."
"냉정하군."
"아니요. 오히려 건전하다는 증거예요."
마사코는 조금 정색하고 말했다.
"바뀔 때마다 좋아져요.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고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변화는 좋은 것이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해나갈 수 없어요."
[스쳐 지나간 거리] 중에서, 시미즈 다쓰오, 정태원 옮김, 중앙북스, 2007
도쿄의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주인공이 제자와의 스캔들에 휘말려 학교를 떠나고 결혼한 제자와도 이혼하게 되고 시골로 내려가 학원 강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참이 지난 후 학원 제자가 도쿄에서 실종되어서 찾아나서는데 그 실종에 이전 사립학교 관계자가 관련된 것을 알게 되는데... 정도로 초반부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데 첫장면의 갑자기 연락이 끊긴 사람 찾기를 보면서는 [화차]가 떠올랐습니다만 이야기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떤 일본 독자 블로그를 보니 이 작가는 "하드보일드라든지 모험소설의 같은 패턴 속에서, 실제로 작가의 시선은 연애소설로 완결하고 있다"는 말이 있네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었나 봅니다. :-) 소설 전체가 모험이 넘치고 미스테리의 연속인 것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것 같지만 40대 초입의 남성 주인공이 겪는 모험담으로 보시면 더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s. 원서가 나온 것이 1990년이니 지금의 거리는 또 바뀌었을 것 같네요.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