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07 22:54
"하지만 내가 틀렸고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
"그럼 어째서 인간 판단 능력에 허영심이 넘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결백하고 존경받는 인간을 잔혹하게 죽인 범인을 밝혀내는 일을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가?"
"나도 알아, 하지만 어쨌거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드네."
"이봐, 피터."
파커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은 모두 이튼 학교의 경기장과 같다는 콤플렉스를 당장 버리게나. 루벤 레비 경이 뭔가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데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잖나. 얘기가 되도록 일단 살해당했다고 하자고. 루벤 경이 살해당했다면 그게 게임인가? 그리고 이 사건을 게임으로 취급하는 게 옳은 일이야?"
"내가 정말 부끄러워하는 게 바로 그거야."
피터 경이 말했다.
"우선 그게 게임이라면 힘을 내서 계속 해 나가겠지. 그런게 갑작스럽게 누군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 일에서 빠지고 싶은걸세."
"그래, 그래, 알겠네. 하지만 그거야 자기 체면을 챙기니까 그런 거지. 일관성 있게 행동하고 싶은 것 아닌가. 근사하게 보이고 싶고. 인형극을 하듯 활기차게 우쭐거리면서 돌아다니거나 인간 슬픔의 비극을 장중하게 따라가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유치해. 살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있어서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이용하겠다는 태도로 해결해야만 하네. 우아하고 초연하고 싶어? 그런식으로 해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위엄 있고 일관성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재미삼아 살인자를 쫓아가서는 악수하면서 '좋은 경기였습니다. 정말 진땀 뺐어요. 내일 복수전을 기대하죠!'라고 말하고 싶어. 그럴 수는 없어. 인생은 축구 경기가 아니네. 스포츠맨이 되고 싶지? 스포츠맨은 될 수 없어. 자넨 책임감 있는 인간일 뿐이야.(Life's not a football match. You want to be a sportsman. You can't be a sportsman. You're a responsible person.)"
"자네는 신학 책을 읽어서는 안 되겠어. 그 책들이 아주 악영향을 끼쳤군."
[시체는 누구?], 도로시 L. 세이어즈, 박현주 지음, 시공사, 2008
축구 팬들이라면 난 이 밑줄 반댈세~ 하시겠지만 어쨌든 파커 형사의 말에 밑줄을 그어봤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뛰어난 추리소설이 갖추어야 할 많은 요소"를 이 책이 갖고 있다고 하면서 첫번째로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꼽고 있는데 매우 동감합니다. :-) 특히 할 말은 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집사 번터 캐릭터는 다른 소설을 통해서도 다시 만나보고 싶습니다.
p.s. 1923년 출간되었으며 저자가 1957년 사망했기 때문에 저작권 소멸된 도서~ 원서는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Whose Body? by Dorothy L. Sayers (1898-1957)
p.s. 번역본과 원서 표지~ 2번째 원서 표지는 소설 내용을 딱 정리하고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