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4 21:12
..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는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남아 있는 나날]중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2009
조금씩 읽어가려고 하다가 그만 푹 빠져서 손에 든채 다 읽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책을 읽었네요. 예전에 본 영화의 장면이나 스티븐스 = 안소니 홉킨스, 켄턴 양 = 엠마 톰슨을 떠올리며 읽어서 훨씬 더 생생한 독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그랬고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 느낌이지만 참 슬픈 이야기네요. 책날개에 써있는 도리스 레싱의 말에 100% 공감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 책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슬픈 책이다." 이런 책이 아마 고전으로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책을 다 읽고 판권란의 역자소개를 보다가 역자이신 송은경님이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는 도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여러 번 지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책의 원제인 "The Remains of the Day"는 "그날의 흔적"이나 "지난날의 흔적" 정도가 맞는 번역이라고 하고 내용상으로도 맞습니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스티븐스가 앞으로 살아갈 남아 있는 날들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 제목인 것 같아서 (원래 영화제목 번역한 사람이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드네요.
p.s. 국내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기있는 작가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홀대를 받은 작가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최근 민음사 모던클래식으로 그의 6번째 소설 [나를 보내지 마]가 출간되었고, [남아 있는 나날]도 다시 나오고, 가장 근작인 [녹턴]도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최근 다시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이 1998년([떠도는 세상의 예술가])이었고 같은해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온 후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제임스 아이보리가 영화화한 [남아있는 나날]이 개봉될 무렵(1994) 영화 포스터를 표지로한 번역본이 나온 것이 전부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15년 만의 귀환이라고 할 법합니다. 그럼에도 발표작품이 7편인 작가의 책 중 5권이 번역출간되었다면 그것을 홀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구요. 개인적으로 절판된 책 중 환상소설 같아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말고 ^^;; [떠도는 세상의 예술가]가 재출간 되길 기대해봅니다. 참 놀라운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