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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한편 나로 말하자면

flipside 2023. 5. 18. 19:29

2010/05/14 00:00

 

오미야에 별명이 드라큘라 백작이라는 남자가 있는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백작이라 불리지만 생업은 괴기소설을 쓰는 일로 그 방면에서는 유명한 모양이니 이름을 적으면 어쩌면 아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나로 말하자면 20대 때 불운한 일을 여러 번 당했다고는 하나 서른이 넘는 지금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놈팡이에 하물며 출판업계와는 본래 연이 없는 인생인데 그나 그의 동료작가들이 영화 시사회나 모 씨 모 상 수상 파티 뒤의 주역과는 관계없는 술자리에 불러주면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심산으로 가서는 온갖 손에서 받아드는 명함에 적힌 사람 이름 회사 이름에 기겁하면서도 내 인생도 그리 쓸모없지는 않았구나 하고 자조 어린 미소를 띠며 아무 직함도 없는 명함을 내미는 식이다. ...


"반곡 터널" 중에서, [아시야 가의 전설], 쓰하라 야스미, 권영주 옮김, 비채, 2009




단편 8편 중 첫번째 단편 "반곡 터널"의 첫부분입니다. 2번째 문장이 참 길죠? 전 이런 식으로 긴 문장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가의 문장은 거슬리는 것 없이 잘 읽히더군요. 이 정도로 길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데도 이야기의 기발함이나 현실과 환상, 망상에 빠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양이 등 여자"와 곰쥐가 소재인 "초서기(超鼠記)"가 가장 무서웠고(전 쥐가 제일 무서워요 ㄷㄷㄷ) "송장벌레"나 "물소 떼"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각 단편이 독립적이지만 백작과 주인공 사루와타리가 모든 단편에 등장하고, 또 각 단편에서 위에 밑줄 그은 20대 때 당한 불운한 일들이 각각 나오는 구조이고, 마지막 단편인 "물소 떼"의 무게감도 큰 편이라서 장편의 느낌도 듭니다. 읽다가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묘사된 장면들을 꽤 선명하게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백작과 사루와타리의 식도락 기행 - 이 두사람은 두부애호가 ^^ - 이나 코믹한 대화들도 무척 좋았구요. Yes24 알라딘의 미리보기에서 "반곡 터널" 전문을 읽어볼 수 있으니 어떤 분위기려나? 궁금하신 분들은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소설 분위기는 원서쪽이랑 더 맞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