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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자식 칭찬을 듣고 싶거든 직접 낳아야 한다

flipside 2023. 5. 10. 22:21

2006/07/17 23:24

 

"... 두 번째 작품의 작가는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연히 타히티라는 주제에 빠진 뒤로 종이 위에 글이라기 보다는 삐뚤빼뚤 힘겹게 수많은 단어를 적어 놓은 게 고작이었다. 도서 목록을 늘리지 못해 안달이 난 젊은 출판인이 아니라면 그런 원고는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원고를 검토하면서 의미심장하고 비범한 특정 사건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게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만 만들면 정말 자부심을 느낄 만한 작품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느꼈다. (중략) 내가 손을 안 댄 문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 손을 안 댄 단락은 분명 없었다 - 고치고 타자기로 다시 쳐서 한 장(章)씩 보내면 저자는 언짢아하면서도 항상 승인을 내렸다. 나는 그 일이 좋았다. 이상한 모양의 꾸러미에서 꾸깃꾸깃한 갈색 포장지를 한 겹, 한 겹 벗겨 내 그 안에 담긴 예쁜 선물을 꺼내는 심저잉었다.(능력 있는 작가의 글을 아주 조금 손보는 것보다 훨씬 보람 있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학구적이고 세부 묘사가 탁월하며 문장마저 빼어난 수작이라는 서평이 실렸다. 저자는 그 즉시 기사를 오려 짤막한 쪽지와 함께 나에게 보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자상하기도 하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서평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내 문장은 나무랄 데가 없었어요.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나는 한참을 웃다 정색을 하고 인정했다. 편집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가끔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보너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편집자는 산파에 불과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식 칭찬을 듣고 싶거든 직접 낳아야 한다. We are only midwives -- if we want praise for progeny we must give birth to our own ..."


[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 중에서, 다이애나 애실, 이은선 옮김, 열린책들, 2006 (진하게 및 원문부분은 제가 추가)




최근 열린책들에서 나오고 있는 출판 관련 책 중 하나로, 편집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이다. 보다 보면 웃음이 나올만큼 재미있는 대목이 많은 데 위에 밑줄 그은 부분도 그 중 하나. 개인적인 비교대상으로는 재미면에서 [서재 결혼시키기](앤 패디먼)에 필적한다. ^^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수작이다.




p.s. Yes24에 올라온 출판사 보도자료에도 윗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아마 열린책들의 편집자도 같은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 -)


p.s. 제목인 "그대로 두기"의 원제는 stet으로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쓰는 교정용어중 "生"에 해당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1차교정을 빨간색 포인트펜으로 보고, 2차교정은 녹색 포인트펜으로 봤는데, 대부분의 "生"표시는 녹색이었다. ^^


p.s. 원서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