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line

[밑줄] 나무 지킴이

flipside 2023. 5. 17. 22:26

2010/05/22 10:57

 

  ... 다완을 무릎 앞에 들고 바라 보았다. 붉은 바탕에 흑유가 흐릿하게 칠해져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나무 지킴이입니다."
  가을에 감을 딸 때 내년에도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단 한 개 남겨놓은 열매가 나무 지킴이다. 붉은 다완의 무엇이 그 이름과 결부되는가.
  "저런, 어디에서 유래된 이름인가."
  이에야스가 리큐에게 물었다.
  "별 뜻 아닙니다. 조지로가 구운 다완을 몇 개 늘어놓고 제자들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하자 이것 하나만 남았습니다."
  묘하게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다.
  ― 이 사내는 희대의 사기꾼이구나.
  지금 그 대답으로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인이라 회자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다이묘, 무사들에게 스승으로 존경받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안목 있는 제자들은 먼저 고른 뒤, 유일하게 남긴 다완이라면 당연히 완성도가 떨어질 것이다.
  그것에 나무 지킴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명물로 만든다니 훌륭한 궤변이 아닌가. 이런 사내를 다인으로 놓아둘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 백락이란 있을 수 없는 법. 다인으로 놓아두기 아깝구나. 주라쿠테이에 있기 불편해지거든 언제든 에도로 오게, 내 1만 석이라도 주고 자네의지혜를 빌려 쓸 테니."
  술기운이 돈 이에야스는 리큐의 다도에 크게 감탄했다. 이렇게 정묘한 두뇌의 소유자를 책사로 삼으면 사뭇 유쾌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리큐가 웃으며 말했다. ...



"나무 지킴이 -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에서, [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권영주 옮김, 2010




주인공 센 리큐[千利休]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茶頭)로 지내며 다도를 관장하다가 말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사(賜死)에 따라 할복한 다도의 명인.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위에 밑줄처럼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고, 임진왜란 발발 전이 배경이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왠지 역사소설같아서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리큐에게 물어라]는 나오키상 수상작.(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과 140회 공동수상. 그러고 보니 둘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네요.) 대중적인 재미는 보장하는 나오키상을 받은 작품 답게 리큐가 할복을 하는 날 부터 순차적으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과 각 장마다 리큐나 리큐의 주변인물을 한 명씩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점, 그리고 중간 중간 정보를 많이 던지고 있어서 추리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감춰진 비밀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점 등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무척 많은 책이었습니다. 화려함과 애잔함,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정렬과 그 곳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편안함 처럼 상반되는 감정이 섞여 있는 작품인데 아직 5월 밖에 안되었지만 올해 읽은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책 말미에 다도 용어와 연보, 다완 종류 가 정리되어 있는데 소설 중간에도 이런 정보가 녹아 있어서 일본 다도에 대한 성긴 입문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자 소개를 보니 대단히 인기 있는 역사소설가로 보이는데 다른 작품도 소개되어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p.s. 나오키상 심사평을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구조가 성공적이었다고 평하는 심사위원이 많고(와타나베 준이치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이야기 했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좋았다고 평가 ^^), 마지막 장면의 처리가 전체 소설에 잘 어울린다는 평도 있네요. 저도 끝부분 처리는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p.s. 번역본과 원서표지. 원서표지 그림은 소설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띄는 무궁화입니다. 백거이의 시 중 "槿花一日自爲榮"가 언급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