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주 5

[밑줄] 한편 나로 말하자면

2010/05/14 00:00 오미야에 별명이 드라큘라 백작이라는 남자가 있는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백작이라 불리지만 생업은 괴기소설을 쓰는 일로 그 방면에서는 유명한 모양이니 이름을 적으면 어쩌면 아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나로 말하자면 20대 때 불운한 일을 여러 번 당했다고는 하나 서른이 넘는 지금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놈팡이에 하물며 출판업계와는 본래 연이 없는 인생인데 그나 그의 동료작가들이 영화 시사회나 모 씨 모 상 수상 파티 뒤의 주역과는 관계없는 술자리에 불러주면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심산으로 가서는 온갖 손에서 받아드는 명함에 적힌 사람 이름 회사 이름에 기겁하면서도 내 인생도 그리 쓸모없지는 않았구나 하고 자조 어린 미소를 띠며 아무 직..

underline 2023.05.18

[밑줄] 나무 지킴이

2010/05/22 10:57 ... 다완을 무릎 앞에 들고 바라 보았다. 붉은 바탕에 흑유가 흐릿하게 칠해져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나무 지킴이입니다." 가을에 감을 딸 때 내년에도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단 한 개 남겨놓은 열매가 나무 지킴이다. 붉은 다완의 무엇이 그 이름과 결부되는가. "저런, 어디에서 유래된 이름인가." 이에야스가 리큐에게 물었다. "별 뜻 아닙니다. 조지로가 구운 다완을 몇 개 늘어놓고 제자들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하자 이것 하나만 남았습니다." 묘하게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다. ― 이 사내는 희대의 사기꾼이구나. 지금 그 대답으로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인이라 회자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다이묘, 무사들에게 스승으로 존경받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안목 있..

underline 2023.05.17

[밑줄] 사와리

2009/04/21 00:00 ... 일본의 전통악기에는 음색에 일부러 잡음을 발생시키는 '사와리'라는 기법이 있는 모양이다. 샤미센으로 말하자면, 중국에서 건너온 삼현을 개조해서 한 현이 진동해 잡음을 내게 만든 것이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곤도 미스터리에 흐르는 샤미센 선율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소설이 엮어내는 연애는 플라토닉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음탕하다. 순수함만이 아니라 살의와 증오를 띄어, 어딘가가 결정적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연애의 선율은 살의라는 사와리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드높이, 경쾌하게 울리리라. 순애 같은 단음單音은 야만의 극치. 사랑과 증오가 밀접하게 혼합된 샤미센 소리의 잡음성에야말로 멋이 깃드는 것이 틀림없다. ... 다카키 히로시의 [얼어붙은 섬] 작품해설 '누구를..

underline 2023.05.16

[밑줄] 미워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2007/12/04 13:39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그런 거들먹거리는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완전히 타인에게 대한 증오 따위 그렇게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워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사건, 쉴 새 없이 나타나는 범죄자에 대해 그런 풋내 나는 감상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만큼 한가하지 않다. ... [얼어붙은 송곳니] 중에서, 노나미 아사, 권영주 옮김, 시공사, 2007 115회 나오키상 수상작. 찾아보니 주인공 오토미치 다카코 형사는 이 장편을 처음으로 이후 작품에도 계속 등장하는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갑작스럽게 사람이 불타 죽는 의문의 살인사건과 그 배후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해당 사건..

underline 2023.05.14

[밑줄] 요즘 시대에 책읽는 사람은 옛날보다 더 미움을 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6/04/29 11:15 "전 여기서 이렇게 책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젋은 세대에게 책 이야기는 거의 금기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더라도 '저 독서합니다' 같은 말은 부끄러워서 못 해요. '야, 너 시험공부 하고 있냐?' '하나도 못 했다'하고 같다고 할까요." "그럴까?" "요즘 시대에 책읽는 사람은 옛날보다 더 미움을 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이치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건 그냥 들어넘길 말이 아닌걸. 어째서?" "글쎄요. 일본사회 자체가 책 읽는 사람에게 냉담해요. 책을 읽는 다는 건 고독한 행위고, 또 시간도 걸리잖습니까. 그런데 일본사회는 바빠요.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느긋하게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책 따위는 읽..

underline 202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