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11

레벌루션 NO.3 | 가네시로 카즈키

2005/09/08 21:24 2003/09/23 [책을 읽고 나서] 외국에서는 착실히 이름을 얻어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우리나라에는 역순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가네시로 카즈키도 예외가 아니라서 지난 2000년 발표된 [GO]가 먼저 선보인 이후, 1998년 작품인 [레벌루션 NO.3]가 번역되어 나왔다. 삼류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과 친구들의 학창생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레벌루션 NO.3]는 크게 3편의 연작이 묶여 1편의 장편을 만드는 모양새를 갖고 있는데, 시간순이 아닌 탓에 구성에 있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사회가 그들을 보는 편견어린 눈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들은 매우 매력적이고 활기차며 당당하다. 번역의 매끄러움도 큰 몫을 했지만 가네시로 카즈키의..

book 2023.05.29

부드러운 볼 | 기리노 나츠오

2005/09/06 20:40 2001/02/05 [책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 일본 나오키[直木]상 수상작이 꽤 많이 소개되긴 했지만 그 어느 한 편도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사라져 간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대중적인 재미에 작품성을 겸비한 소설에게 수여하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일단 내용이나 작가에 관계없이 읽어봐도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여러 수상작을 읽어본 소감이다. 키리노 나츠오의 [부드러운 볼]은 1999년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개인적으로는 2000년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짧게 말해 "남편의 거래처 사장과 불륜에 빠진 주인공의 딸이 실종된 이야기"(영화 [올리비에 올리비에]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인 이 작품은 불륜에 빠진 여성 심리의 묘..

book 2023.05.29

천사의 속삭임 | 기시 유스케

2004/11/07 11:03 [책을 읽고 나서] 기시 유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검은집]이었다. 소설을 읽고나서 무섭다는 생각이 든 몇 안되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작품으로, 그의 다른 작품이라면 괜찮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일본에서는 1998년,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발표된 장편 [천사의 속삭임]은 과학적인 상상력이 강한 소설로 정통호러라고 할 수 있는 [검은집]과는 다른 식의 공포를 준다. 아마존에 다녀온 이후 변해버린 애인의 자살과, 이와 비슷하게 자신이 가장 두려워고 혐오했던 방식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는 기타지마 사나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나에의 직업이 호스피스에서 의료를 담당하는 정신과 의사라는 점은 매력적으로 전체 이야기의 줄거리와 관계없..

book 2023.05.28

멋진 하루 | 다이라 아즈코

2004/11/01 23:24 [책을 읽고 나서] 6편의 단편을 묶어놓은 다이라 아즈코의 [멋진 하루]를 읽고 나서 웬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소설집에는 책 뒤표지에 잘 써놓았듯이 "애인에게 차이고, 회사에선 잘리고.... 그래도 마냥 씩씩한, 귀여운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나온다. 표제작인 [멋진 하루]는 다소 짜여진듯한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베스트극장 한 편을 보는 기분이 들게하는데, 아마 나오는 인물들의 태도나 말투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듯 싶다.(다른 작품도 다 마찬가지인데 한 편 한 편 단막극으로 만든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해바라기마트의 가구야 공주]라는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 딸과 아버지의 미묘한 갈등구조나, 여자가 결혼을 결정하게 되는 심리 등의 묘사가 ..

book 2023.05.28

[밑줄] 모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2009/09/06 15:19 이사와 사토시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돌려드릴게요. 땀으로 더럽혀지면 죄송하니까." 모자를 벗어서 내밀었다. "그렇지만 모자가 없으면……." "괜찮습니다." 이사와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꺼내서 머리에 썼다. 그런 것으로는 이 햇볕에 어림도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사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받아든 모자를 바로 뒤, 비닐 시트 끝에 놓았다. 그리고 그날 돌아올 때까지 모자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모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채굴장으로] 중에서, 이노우에 아레노, 권남희 옮김, 시공사, 2009 처음 국내에 출간된 단편집 [어쩔 수 없는 물]을 읽으면서 무척 마음에 드는 작가지만 아마 이 단편집이 큰 성공을 거둔 것..

underline 2023.05.16

[밑줄] 귀신들한데도 이런저런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2008/10/04 23:34 ... 바로 이런 게 안 좋다니까.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굴면 거기에 귀신이 몰려드는 것이다. 나는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귀신이라. 좋아, 일단 있다 치자고. 하지만 귀신들한데도 이런저런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귀신이 잘 나타나는 사람과 안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파티에 처음 갔다고 하지. 하지만 아무도 소개를 해주지 않는다. 파티에 온 다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며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득 그때 할 일 없이 혼자 따분해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 생각을 하먄 그 마음이 전달되어 상대방도, '말을 걸어주면 한번 얘기해 봐야지.'하는 표정과 태도를 취한다. 먼저 이심전..

underline 2023.05.16

[밑줄] 이노우에 아레노 병

2008/06/22 00:45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을 읽으면 이노우에 아레노 병에 걸린다. 증상을 말하자면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 평소에 나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거나 하지 않는데, 그녀의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이나 다 읽은 후에도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성가신 것은 내가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왠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불안감과 더불어 그런 감정과는 모순된 편안함을 느낀다. 굳이 설명을 시도해본다면, 신간인 [어쩔 수 없는 물]을 읽었을 때 나는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떤 등장인물(들)에 대해 독자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필연적으로 다음에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멍하니. ... [어쩔 수 ..

underline 2023.05.15

[밑줄] 물론 아이는 천사가 아니란 사실을 다들 안다

2006/12/16 19:49 "교코, 아이는 좋아하니?" 나가다니가와씨가 물었다. "싫어해요." 희한하게도 아이를 좋아한다는 여자는 착해보이고 아이를 싫어한다고 하면 심술 맞아 보인다. 물론 아이는 천사가 아니란 사실을 다들 안다. 지저분하고 거짓말 잘하고 제멋대로이고 멍청하고 성가시다. 나는? 나는 밉상스런 아이였다. 예를 들어 세뱃돈 대시 물건을 주면 받는 순간부터 의미도 없이 이 어른을 가장 실망시킬 만한 일이 무엇일까 궁리했다. 눈앞에서 장난감을 정원에 던지거나 부수거나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아이와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싫어한다. ... "노동감사절"중에서, [바다에서 기다리다], 이토야마 아키코,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6년 표제작인 "바..

underline 2023.05.12

[밑줄] 한 인간으로서 나는 정말로 진화하고 있나?

2006/09/07 22:46 ... 우리 인간은 CPU의 처리 속도나 기록미디어의 용량처럼 제대로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진화를 이뤄냈을까? 하드웨어는 한없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는데, 한 인간으로서 나는 정말로 진화하고 있나? 꼭 진화가 아니더라고 상관없다. 적어도 매일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페이지는 생각했다. 이 저질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자폭과 테러와 전란이 빈발했다. 굶주림이나 부족 항쟁도 먼 대륙에서는 아직 일상적인 일이었다. 우리들의 세상이 지능을 탑재한 순항 미사일 정도의 영리함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키하바라@DEEP의 대표는 원색의 돌출간판이 하늘의 3분의 1을 매우고 있는 메인스트리트를 한가로이 걸으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 [도쿄 아키하바라] 중에서,..

underline 2023.05.11

[밑줄] 바보구나

2006/03/25 13:03 ... 바보구나, 라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오다리기는 매번 나를 보고, 바보구나, 라고 말한다. 몇 번을 들어도 히나코는 그 말이 좋았다. 언제나 완벽한척 허세를 부리는 자신이 그 말 앞에서는 홍차에 각설탕 녹듯이 흐물흐물 무너지는 달콤한 기분이 든다. 어떤 의미에선,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하고 히나코는 생각한다. 좋아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좋아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도 포함하여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도 좋아해라든지 잠깐만이라든지 하는 대답을 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바보구나, 하면 에이, 뭐가, 하며 바보처럼 웃고 있어도 된다. 보류해도 된다. 엑시트 뮤직에서 카운터를 사이에 둔 거리, 그것이 그와의 바른 거리라고 히나코..

underline 202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