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선 6

[밑줄] 누명

2011/06/29 23:27 "저 같은 전과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건방지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미야기 교도소에 있으면 쇼와 그 자체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쇼와 그 자체?" "예. 혹은 쇼와라는, 무리하게 급성장한 시대의 일그러짐이랄까, 외상이랄까, 그런 것이 거기에 꾸역꾸역 쑤셔 넣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선생님이나 고명한 작가 분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저한테 글 쓰는 재능이 있다면 세상을 향해 그런 것을 쓰고 싶다고 몇 번쯤 생각했습니다." "외상이 무슨 뜻입니가?" "건방진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누명이란 무리한 질서유지 혹은 치안유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범인이 나오지 않으면 주민에게 사회 불안이 싹트고 나아가 경찰에 대한 불신이 ..

underline 2023.05.18

[밑줄] 그러니까, 지배해 버리고 싶다는 겁니다

2009/06/25 08:05 "아마, 저는 어떤 종류의 독재자를 동경하는 걸 겁니다." 야리나카는 말했다. 여의사는 다소 당황한 듯이 눈을 깜빡이며, "독재자……." "말이 과격합니까?" "어떤 의미인가요?" "60년대 이후 일본 현대 연극의 '언더그라운드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게 있습니다. 많든 적든 현재에도 그것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죠. 그중에서도 '집단 창조'라는 개념이 60년대에서 70년대, 그리고 현재를 잇는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말하며, 연극을 만드는 집단에서 누구나 작가이고 연출가이고 배우이기도 하고 스태프이기도 한, 신분의 동위성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입니다. 요는 극단 내의 계급제도를 걷어치우라고 하는 겁니다.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지요. 강력한 지도자는 필요 없다. ..

underline 2023.05.16

[밑줄] 어째서 나랑 사귀기로 했어?

2008/03/09 20:18 "무슨 일이야?" 기척을 느끼고 미치히코가 내 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별거 아냐." "잠이 안 와?" "그런 건 아닌데……. 있지, 미치히코 말이야." "뭐?" "어째서 나랑 사귀기로 했어?" "무슨 말이야. 갑자기……." 미치히코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저기, 그때 미치히코는 여자 친구 있었잖아? 게다가 나는 점술가로, 딱히 친구도,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나와 사귀랴고 한 건가 해서." "어째서라니, 루이즈가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뿐이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자기랑 사귀라고 했잖아?" 미치히코는 눈을 쓱 비볐다. 졸릴 때 자주 하는 몸짓이지만, 비빈다고 해도 미치히코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이지. 딴 이유는 없어?..

underline 2023.05.14

[밑줄] 호기심을 먹고 자라는 요괴

2007/12/26 22:58 … 와타루는 소문이란 마치 사람의 호기심을 먹고 자라는 요괴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영양을 공급해 주면 요괴는 제멋대로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그리고 점점 커져서 상상도 못할 힘을 얻어 끝없는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한다. …… 호기심이 사라지면 요괴는 급속히 힘을 잃고 머지않아 작게 오그라든다. 그러나 그때는 새로운 요괴가 태어난다. 와타루는 자신을 둘러싼 공기 속에 마치 유령처럼 무수한 요괴가 떠돌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보고 있는 동안은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괴의 눈에 띄면 끝장이다. … [죽어도 잊지 않아]중에서, 노나미 아사, 한희선 옮김, 시공사, 2007 중간까지 읽다가 주인공 중 한 명인 와타루가 학교에서 소문으로 따돌림 당하는 모습이 너무 생생..

underline 2023.05.14

[밑줄] 도쿄 타워의 정면이 어딘지 알아?

2007/07/06 23:31 "저어, 미치코." "왜요." "도쿄 타워의 정면이 어딘지 알아?" 미치코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어디서 봐도, 언제 봐도, 도코 타워는 나한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미치코가 조용한 걸음으로 나와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렸다. "상관없잖아요. 어느 쪽이든 우리 집 창문에서 도쿄 타워는 보이지 않으니까." "배신하지 마" 중에서, [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미유키, 한희선, 북스피어, 2007 6편의 단편 모음. "화차"의 원형이 된 작품이 있다기에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당연히 읽어야지~ 하면서 읽었습니다. :-) 모두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역시 찾아 읽게된 동기가 된 "배신하지 마"가 가장 끌리더군요. 유머스러운 면이 많았던 "나는 운이 없어"도 좋았구요..

underline 2023.05.13

[밑줄] 인지[印紙] 이야기

2006/10/27 14:16 나는 어릴 때부터 검인지에 흥미가 있어서, 여러 가지 책의 뒤쪽을 펴고는 종이 디자인이나 찍힌 도장의 글자를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도장 찍는 법도 꼼꼼하게 정중앙에 똑바로 찍혀 있는 것, 비스듬한 것, 종이 가장자리에 가까운 것, 인주를 잘 묻히지 않아서 반쯤 희미해져 있는 것 등 제각각이었습니다. 알맹이도 표지도 모두 인쇄, 제본도 기계로 하는 오늘날 책 속에 이 부분만 한 권 한 권 손으로 작업하기에, 개성이 묻어있는 점에 마음이 끌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내 도장을 찍은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검인은 그 특성상 비교적 짧은 일수에 많이 찍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귀찮다고 하면 귀찮은 시스템입니다. 출판하는 쪽도 검인을 위해 필요한..

underline 2023.05.11